보건의료분야에서 가장 첨예한 의견대립을 보이는 이슈는 의약분업과 건강보험 재정통합에 관한 문제들이다. 두 가지 현안은 현 정권 임기 중에 추진한 정책이 사회문제까지 비화한 사례다. 또한 현 정부의 행정집행능력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선거쟁점으로 부상했다. 또한 의료계, 약계 등 이익집단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극심한 자기목소리 내기를 하고 있어 대선후보들로서는 다루기 조심스러운 정책 분야이기도 하다.의약분업에 대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후보와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접근 방식은 상당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두 후보 모두 의약분업 체계의 장래에 대해 명확한 결론은 유보하고 있다. 건강보험재정의 문제는 국민의식의 변화와 인구구조의 변화 등으로 비롯된 지출증가를 제때에 따라잡지 못하는 수입구조로 야기된 구조적이며 장기적인 문제이다. 여기에다 의약분업과정에서 발생한 이해당사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의료수가와 약가를 수 차례에 걸쳐 올려준 것 때문에 급격하게 터져나온 부작용이다. 이에 대해서도 이 후보는 시장적 해결방안, 노 후보는 현재 틀에서의 보완책을 제시하는 등 입장이 대비되고 있다.
이회창 후보
이 후보는 의약분업을 현 정권의 대표적 실정으로 꼽아왔다. 이에 따라 집권 후 전면적인 재평가를 약속하고 있다. 다만 시행 후 2년이 지난 만큼 뒤로 돌리거나 백지화하지는 않겠다면서 정책의 안정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는 의료계, 약계, 전문가 들이 참가하는 '의약분업 평가위원회'를 통하여 현행제도를 바꾸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건강보험재정의 경우 그 동안 추진되었던 재정통합을 유보하는 한편 '건강보험 재정안정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개혁안을 마련하도록 하고 있다. 또 건강보험에서 제외되는 급여를 보완하는 보충성 민간보험을 도입하여 보험재정을 절약하고 의료선택권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 밖에 재정안정을 위해 수가체계의 개선, 진료비심사 강화, 질병예방 및 건강검진 강화 등을 제시하고 있다. 보험료의 징수에 있어서도 소득파악을 제대로 해 보험료 부담의 형평성을 제고하는 것과 보험급여에 상응하는 적정보험료 계산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그런데 위원회를 설치하여 재검토하겠다는 공약은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은 채 단지 이해조정에 따른 마찰을 지연시키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실제 한나라당측은 의사협회, 약사협회 등 선거기간 전 접촉하여 온 이해집단에 따라 그 강조사항을 바꾸어 왔다. 그러나 재정안정화를 위해 의료전달체계에서 시장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접근방식은 일관성이 있어보인다. 현재의 의료체계가 80% 이상을 민간공급자에게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보험재정 운영주체를 분권화하여 자율적인 시장기능을 도입하는 방안, 민간의료보험을 도입하여 의료선택권을 확대하겠다는 공약들이 같은 맥락에 닿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은 시장기능을 극대화하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의료비 부담을 보이고 있는 미국의 예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장기적인 측면에서 보험재정의 구조적 안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이러한 시장지향성은 사회복지공약의 다른 한 축에서 언급하고 있는 보건지소 설치확대 등 공약과 괴리를 보여 전체 공약의 편차를 증가시키고 있다.
노무현 후보
노무현 후보는 한 때 의약분업을 승용차의 안전띠에 비유하며 불편을 감수하고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반면 사회적 합의 없이 추진한 졸속 정책의 대표사례로 의약분업을 꼽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공식 공약에서는 의약분업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 그때그때 정치적 수사를 내놓으면서 첨예하게 맞서 있는 이익단체의 이해관계를 의식, 구체적인 정책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정면 대응을 피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반면 건강보험재정의 경우에는 수가와 약가를 적정선으로 개편, 허위 청구나 무분별한 의료기관이용 등의 방지, 초고소득층의 보험료 상한선 조정, 자영업자의 소득파악 강화, 질병예방기능 강화 등을 내걸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적인 방안들은 대부분 한나라당의 공약에서도 언급된 내용들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민주당의 공약은 현재 의약분업체제를 보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며, 건강보험재정의 경우에도 현재의 틀을 바꾸지 않고 개선책을 찾아보겠다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이 정책은 그 동안 잠재적으로 축적돼온 문제점들의 구조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 사회적 인식변환이 동반되지 않은 채 현재 갈등의 측면마저도 무시하고 있는 제안이다. 실제 노 후보측이 제시한 재정안정책은 그 동안 계속 언급된 것들로서 새로운 것이 없다. 이 공약들로만 재정균형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국가재정투입의 확대와 의료전달체계 자체의 개혁 등 의료전반에 걸친 구조적인 개선이 동반되지 않는 한 비관적이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 모두 보험재정 안정을 위해 미시적인 측면에서 가용한 방안들은 모두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거시적이고 장기적으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단지 이회창 후보의 위원회설치 제안들이 이해관계와 사회의식의 괴리가 빚는 문제들을 정면돌파하기 위한 과정으로 사용될 수 있다면, 그리고 노무현후보의 국민과의 신뢰구축이 정말 사회문화적인 측면까지 고려할 수 있다면 공약(空約)이 아닌 공약(公約)에 더 가까이 설 수 있을 것이다.
대표집필/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지금은 이렇다 / 의약분업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표어와 함께 시작된 의약분업은 시행 2년이 지난 지금까지 폐지론이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시행 초기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다고 자평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이 준비부족 등 졸속 시행을 지적하며 DJ 정권 최대 실책 중 하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의·약계의 주장도 평행선을 달린다. 대한의사협회는 의약분업의 폐지와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의협 주수호 공보이사는 "의약품 오남용 해소 등을 명분으로 의약분업을 시행했지만 결과는 의사들에 대한 불신조장과 국민불편, 2조원 대에 달하는 건강보험 재정파탄"이라며 "아직도 약사들의 불법 임의조제는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대한약사회는 제도 자체보다는 운영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현행 틀 속에서 보완해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약사회 원희목 부회장은 "현행 분업의 틀을 바꾸는 것은 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대체조제 활성화 등을 통해 국민불편이나 고가약 처방에 따른 비용부담을 감소시켜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후보들의 말
▶ 이회창 후보
"이 정권의 오만한 개혁과 독선이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 입만 열면 서민정권이라고 하지만 준비 안된 의약분업으로 서민만 골탕 먹었다."(5월29일 부천 정당연설회)
"국민의 고통과 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의약분업을 재평가해야 하지만 이미 실시한지 2년이나 됐으니 뒤로 돌리거나 백지화해서는 안 된다."(8월28일 약사회장단 면담)
"집권하면 정부와 의료계, 약계, 전문가 등이 모두 참여한 의약분업 재평가 위원회를 구성, 모든 문제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구축하고 재평가 하겠다."(11월25일 의협 초청 강연)
▶노무현 후보
"안전벨트를 처음 맬 때는 아주 불편하지 않았나. 그러나 지금은 반드시 맨다. 의약분업의 불편을 이겨내야 한다." (11월7일 KBS 후보초청 국민토론)
"의사들의 수입이 그전보다 많이 높아졌다고 바로 끌어내리면 사회적 저항이 생긴다. 의료수가를 적절히 조절하는 데는 4∼5년이 걸린다." (〃)
"아무리 좋은 제도도 사회적 합의 없이 무리하게 추진해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이는 '의약분업' 시행과정에서도 확인한 사실이다." (8월28일 민주당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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