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을 듣고 단어를 맛보며 음악을 그리는 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글자나 숫자를 특정한 색깔로 인식, 비슷한 숫자가 마구 뒤섞여 있어도 색을 보듯 식별하는 이들이다. 최근 영국 방송사 BBC는 이런 공감각(共感覺, synaesthesia) 능력을 가진 이들을 인터뷰, 보도했다. 이들 중 패트리샤 더피라는 번역가는 P와 R을 노란색과 오렌지색으로 인식했고, 제인 맥케이라는 화가는 음악을 들으면 단풍, 노란색, 어떤 맛 등으로 여겼다. 조셉 롱이라는 피아니스트는 음정마다 색을 구분했고, April(4월)이라는 단어의 독특한 맛을 느끼기도 했다.이렇듯 5감을 한꺼번에 섞어서 쓰는 공감각 능력자들에 대한 연구가 뇌의 연구와 인지과학에 새 장을 열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신경과학 연구진은 글자나 숫자를 색깔로 인식하는 이들을 모집한 결과 2,000명 중 한명 꼴이라는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인구비율로 따지면 우리나라에도 2만명 정도가 이런 능력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성과 왼손잡이에서 이런 능력이 더 흔히 발견됐고, 모계를 통해서 유전된다는 조사가 발표되기도 했다.
만약 독자들이 이러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 간단히 확인하고 싶다면 5와 2가 뒤섞인 그림판에서 2를 얼마나 빨리 찾아낼 수 있는지 시험해보자. 공감각 능력자들은 5와 2를 다른 모양의 숫자가 아닌, 다른 색깔로 인식하기 때문에 한눈에 이를 식별한다. 흑백의 그림을 컬러 그림처럼 보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연세대 심리학과 김민식 교수는 "전혀 모르는 외국어로 동그란 것과 뾰족한 것을 연관지으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맞히는 등 인류에게 공통적인 공감각은 있다"고 말한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제프리 그레이는 BBC 방송에서 "처음 말과 글을 배우는 유아시절의 학습경험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란색으로 쓰인 글자판으로 글을 배운 최초의 경험이 인지 방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색깔은 기억력을 돕는 강력한 도구다. 연세대 심리학과 정찬섭 교수는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은 흔히 여러 형태의 감각을 활용해 뇌에 다중저장을 한다"며 "색깔을 연관시키거나 감정을 이입하는 것 등이 기억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선택된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자를 색깔로 볼 정도로 공감각 능력이 확연한 이들은 뇌의 신경연결이 특이하다는 사실이 최근의 인지신경과학적 연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영국 정신의학연구소는 6명의 공감각자들을 대상으로 눈을 가린 채 단어와 그냥 소리를 들려주고 양전자촬영장치(PET) 등으로 뇌를 촬영했다.
그 결과 피실험자들은 뇌의 언어영역뿐 아니라 색과 모양을 종합하는 영역과 형태소(문자나 숫자)를 담당하는 뇌 영역이 동시에 활성을 보였다. 눈을 가려 시각 자극이 없었음에도 뇌의 시각영역이 활성화한 것이다. 김민식 교수는 "일반적인 사람은 색을 보는 뇌 영역과 형태소를 감지하는 뇌 영역이 병렬적으로만 연결돼 있는 반면 공감각 능력을 가진 이들은 상통하도록 교차 연결돼 있어 숫자만 봐도 색이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지과학자들은 공감각 능력을 신경계의 이상으로 보면서도 이런 능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 예술활동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연구의 진전에 따라 뇌의 인지기능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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