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집마다 연탄을 때던 시절, 탄광 지역은 펄펄 살아있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광부들과 그들을 상대로 먹고 사는 주민들이 어울려 땅 속에서 캐낸 검은 돈 쓰는 재미를 누렸다. 경북 문경도 그랬다. 1970, 80년대 문경은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탄광 지대로 전국 석탄 생산량의 12∼15%를 생산했다. 문경읍과 마성면, 가은읍, 점촌에 크고 작은 석탄 광업소가 40여 개나 돼 광부가 1만 명이 넘었다. 광산 경기 덕분에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고 할 만큼 돈이 흔하고 잘 돌았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석탄산업이 사양길에 들면서 문경도 함께 가라앉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시행된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에 따라 문경의 탄광들도 역사 저 편으로 사라졌다. 1994년, 대한석탄공사가 운영하던 가은읍의 은성광업소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1975년에는 16만 명이 넘던 인구도 계속 줄어 지금은 8만 9,000여 명에 불과하다.이제 탄광은 흔적조차 없다. 갱도는 메워지고, 광부들이 살던 사택은 없어지고, 석탄과 폐석을 쌓아두던 곳은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 복구했다. 탄 가루가 날려 흰 양말을 신고 다닐 수 없던 게 언제 적 일인가 싶다. 은성광업소 자리에 1999년 문을 연 문경석탄박물관에 가야 그 시절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박물관은 석탄산업 변천사에 관한 각종 자료와 함께 실제 갱도 중 230m를 광부들의 작업을 보여주는 전시장으로 꾸며놓고 있다.
"볼 장 다 봤지. 예전엔 탄광 덕에 살았는데, 지금은 뭐가 있어야 말이지. 쓸 만한 공장 하나 없으니 농사 짓든지 장사 하는 것 말고는 벌이가 있나. 지방 소도시가 다 그렇겠지만, 여기도 젊은 사람이 남아있질 않아 인구는 계속 줄고, 부동산 거래도 거의 안돼요. 문경에서 가장 큰 공장이 뭔지 아세요? 문경시청이예요. 본청 직원만도 400명이니까."
문경시내 중앙시장에서 국밥집을 하는 60대 주인의 말이다. 젊은 시절 점촌에서 광부들을 상대로 포장마차를 했다는 그는 그때에 비하면 지금 장사는 장사도 아니라고 했다.
지금의 문경시는 1995년 점촌시와 문경군을 합친 것이다. 1980년대 초 전국적으로 부동산 투기가 일기 전만 해도 점촌은 '작은 서울'로 불릴 만큼 은성했다. 주민들은 당시 점촌 집값이 서울과 비슷할 만큼 셌다고 기억한다. 교통의 요충인데다 탄광 호황이 겹쳐 경북 지역에서 김천 다음으로 큰 상권을 형성, 인근 예천과 상주에서도 점촌으로 장을 보러왔다.
탄광과 부침을 함께 한 것은 문경읍도 마찬가지다. 문경읍 인구는 80년대 초 2만 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8,700명 선에 머물고 있다. 그나마 매년 300∼500명 정도는 서울 등 외지로 막노동을 나가 한 달에 한 번 꼴로 집에 오는 실정이라 상주인구는 더 적은 형편이다.
탄광이 잘 돌아가던 시절에는 농민들도 대개 탄광 일을 했다. 광부 월급이 공무원의 2∼3배로 높은데다 일은 하루 3교대로 8시간씩 했기 때문에 부지런만 떨면 농사일과 병행하면서 목돈을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경읍사무소 공무원 임종대(49)씨는 "전엔 문경읍이 전국에서 술집이 제일 많다고 할 만큼 흥청댔다"고 전한다. "광부들은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해서인지 돈을 펑펑 썼어요. 덕분에 장사도 잘 됐죠. 읍내 3개 광업소에 광부가 1,000명쯤 됐는데, 광업소 사택만으로는 모자라서 집집마다 광부 가족에 세를 줬어요. 한 달에 한 번 읍내 광업소가 모두 노는 날이면, 술 먹고 취해서 싸우는 광부들 때문에 경찰에 비상이 걸리곤 했죠."
폐광 이후 침체된 지역경기를 되살릴 대체산업 육성은 문경의 고민이다. 문경은 관광 진흥에서 길을 찾고 있다.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 가는 고갯길로 유명한 문경새재를 비롯해 최근 개발된 온천, 주흘산 조령산 희양산 대야산 등 명산과 계곡이 자원이다. 지난해 문경의 관광객은 400만 명을 돌파했다.
최근 들어 문경을 알리는 데 가장 큰 몫을 한 것은 문경새재도립공원 안에 있는 KBS 촬영장이다. TV 인기 사극 '태조 왕건'의 세트장으로 궁궐과 기와집, 초가 등 97동의 전통 가옥이 들어선 이 곳은 2000년 3월 완공 이후 명물이 됐다. 그 덕에 1999년 41만 7,000명 선이던 문경새재 관광객이 2000년에는 그 다섯 배에 가까운 206만 여 명으로 급증, 문경을 찾는 전체 관광객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태조 왕건'의 인기를 업고 여기저기 노래방 빌라 모텔 식당 이름에도 '왕건'이 붙어있는 게 재미있다.
탄광이 문경의 과거라면, 문경의 오늘과 미래를 보여주는 곳 중 하나는 문경읍이다. 시는 문경읍내 문경새재와 최근 개발된 온천을 중심으로 관광단지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최근 2∼3년 새 문경읍내에는 여관과 모텔이 속속 생겼고 지금 짓고 있는 데도 7, 8 군데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개발 초기라 크게 활기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현재 문경읍 주민의 생업은 사과 농사가 대부분이다. 이화령 터널을 지나 문경읍으로 들어서면 벼를 베어낸 논과 함께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사과밭이다. 잎을 모두 떨군 나뭇가지들이 겨울 햇살에 반짝인다. 문경사과는 예로부터 달고 맛있기로 유명한데, 최근에는 대만 등 외국에 수출도 하고 있다.
문경의 역사는 흔히 '길의 역사, 고개의 역사'로 불린다.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 문경새재를 오가던 선비나 장사꾼과 더불어 풍물과 인정이 함께 흐르며 문경의 터전을 다졌다. 나뭇꾼들은 새재를 넘으며 노래를 불렀다.
"문경새재야 참싸리 낭구는 꽃가마 꼬지로 다 나가고/ 문경새재야 뿌억싸리는 북어야 꼬지로 다 나가네/문경새재는 웬 고갠가/구비야 구비 구비가 눈물이 난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문경새재아리랑)
문경은 국도 3호선과 34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이다. 현재 문경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국도 3호선의 4차선 확장 공사와, 그 옆으로 나란히 강원도 원주에서 경북 구미까지 잇는 중부내륙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해발 1,106m의 주흘산 등 높은 산이 많은 고장이라 난공사 구간이 많다. 고가도로가 놓일 높다란 교각 기둥이 곳곳에 우뚝 서있고 산에는 여기저기 터널을 뚫고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는 2004년 완공 예정이다.
지금도 교통은 편한 편이지만, 중부내륙고속도가 뚫리면 서울까지 거리가 지금의 3시간에서 1시간 50분으로 더욱 가까워진다. 문경-충주간 철도도 2005∼2008년 건설될 예정이다. 점촌에서 문경―가은까지 석탄 열차가 다니던 철도는 폐광과 함께 진작에 운행이 끊겼지만 새 길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문경'(聞慶)은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다. 문경은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글 오미환기자 mhoh@hk.co.kr
사진 김재현기자
■문경시 현황
인구 8만9,234명(65세 이상 1만3,027명)
2002년 예산 2,467억원
행정구역 2읍 7면 5개 동
경계 북으로 충북 단양군 제천시 충주시, 동으로 경북 예천군, 남으로 경북 상주시, 서로 충북 괴산군
면적 912.08㎢(경북의 4.6%. 임야 78%)
산업 농가 9,273가구 2만4,519명
경지면적 11,886㏊(논 6,519㏊ 밭 5,367㏊)
제조업체 466개 1,719명
특산물 문경사과(재배 농가 1,859호, 재배면적 1,350㏊, 연간생산량 2만3,369톤) 호산춘(전통술) 버섯 쌍샘배 도자기 등.
주요 명소 주흘산 조령산 대야산 희양산 봉정사 문경새재도립공원 KBS촬영장 문경온천 문경석탄박물관 등.
■ 광부출신 주민 심만섭씨
문경의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폐광과 함께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문경제일병원 산재병동에는 진폐환자 269명이 남아있다. 떠난 사람들은 잘 풀린 예가 별로 없고, 세상 물정에 어두워 사기를 당한 사람도 많다고 한다.
문경의 대야산 용추계곡 입구에서 돌다리식당을 하는 심만섭(58·사진)씨는 광부 출신으로는 비교적 성공한 사례다. 그는 가은읍 은성광업소에서 25년간 일했다. 처음 3년 반은 탄을 캤고, 73년 시험에 합격해 관리직으로 옮겨 있다가 94년 폐광으로 퇴직했다. 그는 1964년 문경종고 광산과를 졸업한 이튿날 강원도 정선의 함백광업소로 가서 광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고등학교 광산과는 나오기만 하면 취직은 걱정이 없었다. 거기서 3년 일하다 군대를 갔다 와 다시 은성광업소에 들어갔다.
"수백m 땅 속은 온도 30도, 습도 80% 이상으로 숨이 막히고 탄 가루에 앞이 안보여요. 탄 캐면서 속으로 많이 울었죠. 내 인생 이렇게 끝나는가 하고. 그래서 죽기살기로 공부해서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 자리를 옮겼죠."
용추계곡으로 들어온 건 8년 전. 힘든 광산 생활에 쌓인 스트레스를 산을 다니며 풀던 중 '내가 살 곳은 여기다' 하고 퇴직금을 털어 집을 짓고 식당 겸 민박을 차려 살고 있다.
"대한석탄공사가 운영하던 은성광업소에서는 질 좋은 석탄이 났어요. 연탄 공장에서 직원을 파견해 상주시키면서 6개월 선금을 주고 석탄을 사가곤 했죠. 은성광업소에는 광부 1,300 명이 연간 1,000톤 가량을 캤는데, 폐광 무렵에는 500명쯤 됐죠. 다 떠나고, 문경에 남은 사람은 한 50명 될까. 한창 때 가은역 앞에는 여자 있는 술집이 스무 개쯤 됐고, 돼지고기를 먹어야 탄 가루가 씻겨내려간다고 해서 식육점도 손님이 끊이질 않았죠. 광부 옷을 입고 있으면 어딜 가나 외상이 통했고, 월급날이면 술 먹고 비틀대거나 쓰러진 사람들로 길이 복잡했어요."
은성광업소 시절의 잊지 못할 일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은 1979년 10월 26일 터진 화재사고를 기억한다. 44명이 죽은 이 대형사고는 10·26에 묻혀버렸다.
지금 그는 대야산을 찾는 외지인의 길 안내를 하고,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악인이 갖고 온 차량을 하산 지점에 옮겨 놓는 일을 자청하는 등 장사 틈틈이 대야산을 알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 탄광에서 보낸 힘든 세월을 뒤로 한 채, 그는 이제 관광 문경의 자원 중 하나인 대야산에서 소박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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