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 우리의 대선 운동방식이 급속한 속도로 미국을 닮아가고 있다. 과거에는 후보들이 전국을 누비며 유세를 벌이는 '진지전'의 양상이었으나 이제는 미디어를 이용한 '공중전'으로 변하였다. 1987년과 92년 대선에서는 후보들이 유세에 누가 더 많은 사람을 동원하느냐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였으나, 97년 대선 이후 TV토론과 연설 및 신문광고 등을 비롯한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해졌다.지난 번 노무현-정몽준 TV토론 후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는 미디어 선거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지금까지 각각 2회와 1회의 정당연설회를 개최한 반면 공중파 방송과 케이블 TV 초청 후보자 대담 토론회에는 모두 82회나 참석했다.
더욱이 97년 대선에서 TV토론이 유권자의 후보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번 대선 후보들은 남은 기간 선거운동이 결국 미디어에서 승부가 날 것으로 보고 사활을 건 경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는 2,000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네티즌을 겨냥한 사이버 선거전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그런데 미국처럼 우리의 미디어 선거가 여러가지 부정적인 면을 현저하게 보여주고 있다. 과거 우리의 대규모 유세가 청중 동원에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미디어 선거가 돈이 적게 드는 선거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번 대선에서 이미 신문광고에 한나라당이 12억원, 민주당이 10억8,000만원을 각각 사용했고, TV광고를 합치면 전체 선거비용의 3분의 1 이상이 미디어 선거용으로 지출되고 있다. 이런 고비용 미디어 선거가 유권자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TV토론이나 신문광고 등이 후보의 능력이나 정책보다 스타일이나 이미지를 전달해 주는 역할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의 하이라이트라고 여겨졌던 3일의 1차 대선후보 합동TV토론회를 지켜본 국민들은 크게 실망했다. 대선후보들의 토론이 수준이하였기 때문이었다. 주요 정당 후보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공방에만 열중한 나머지 공약이나 비전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부패 원조당'과 '부패 신장개업당'이 서로 공방만 하다 보니 정치, 외교, 안보 분야의 중요한 국가적 과제를 놓쳐 버렸다.
또 후보들이 스스로의 약점을 감추면서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내는 전략으로 나온 결과 수준낮은 토론이 되어 버렸다. 이회창 한나라당후보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애를 쓰다보니 어색한 표현이 많았고, 노무현 민주당후보는 자신이 많은 사람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중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다 보니 자신의 얘기가 사라지고 방어에 급급하는 인상을 주었다. 후보의 진솔한 모습과 알찬 답변을 듣고 싶어했던 많은 국민들은 허탈한 심정이었다.
내일 밤 경제분야 제2차 합동TV토론회가 열린다. 최근 어느 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유권자의 최대 관심은 경제라고 하니 내일 TV토론에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본다. 이번에는 보다 수준 높은 토론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국민이 후보들의 공허한 답변이나 추상적이고 교과서적인 답변을 듣기 위해 토론을 시청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경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 자신의 경제정책의 기본 목표, 주요 현안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법, 자신의 경제 정책의 실현 가능성 등을 설득력 있게 시청자에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일 밤 토론을 보고 난 유권자들은 후보들이 던진 화두나 해법을 두고 서로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 정보화시대에 미디어 선거가 어쩔 수 없는 대세라고 한다면 이러한 미디어 선거를 국가적 과제를 논의하는 중요한 기회로 삼아야지, 정치인들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추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김 용 호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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