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과 관련이 있는 분들은 나가주십시오. 선거 얘기를 하더라도 '누구를 밀어야 된다'라고 하지말고 '누구를 지지한다'는 식으로만 하세요."서울 A고교의 동창회 '송년의 밤' 행사가 열린 5일 저녁 서울 R호텔. 동창회장 박모(56)씨가 연단에 올라 이렇게 주의를 준 다음 행사를 시작했다. 이후 여러 사람들의 발언이 '선거법'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긴 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대체로 한 후보에 대한 지지로 흘렀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선거운동기간 중 정치적 성격의 동문회나 향우회 등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면서 선관위의 감시를 피한 '정치모임 신풍속'이 속출하고 있다.
중견회사 부장 김모(46)씨는 고교 동기 모임을 2일 오전 8시 시내 한 호텔에서 가졌다. 그 날 모임은 모 정당에서 일하는 친구가 마련해 자기 당 후보에 대한 지지를 부탁하는 자리였다. 오전 9시만 넘으면 선관위 직원들이 호텔을 뒤지고 다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이른 아침에 모임을 잡은 것이다. 서울 시내 한 호텔 관계자는 "보통 조찬모임은 하루에 2, 3건씩 10명 이내의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지만 최근에는 20명 정도가 참석하는 모임이 하루 7, 8건 정도씩 예정돼 있다"고 전했다.
아예 서울 근교의 골프장에서 '새벽 라운딩'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 A대학 과동기 모임이 7일 새벽 6시에 수도권 소재 골프장에서 열렸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김모(43)씨는 "표면적인 이유는 운동(골프)으로 연말모임을 대신 하자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있는 친구가 선관위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라고 귀띔했다.
■대규모에서 소규모로
서울 강남의 한 특급호텔 관계자는 "대선 때문에 호텔의 연말예약이 줄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얘기"라고 말했다. 이 호텔의 경우 연말 연회장 예약건수가 지난해보다 20%정도 증가했다. 100여명씩 참석하는 대규모 모임은 줄었지만 10∼20명 규모의 친목 모임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 특징. 외부의 눈을 피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운 '정치적 소모임'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12일 재경 A향우회 성동 광진 지역 모임이 예정돼 있다는 한모(47)씨는 "선거전에는 각 지구별로 20여명 정도가 참여하는 소규모 모임을 갖고 전체 향우회 모임은 선거 후에 따로 열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씨는"향우회 차원에서 한 후보에 대한 지지를 결의하기 위한 모임이지만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소규모로 쪼개 열리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관위 적발건수 제로
이렇게 교묘하게 선관위의 감시를 피하기 때문인지 아직까지 선관위에 적발된 불법 사례는 한 건도 없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전국 224개 지역선관위에서 지역당 40∼50명 정도씩 24시간 감시를 하고 있지만 모든 모임을 다 감시할 수는 없는 형편"이라며 "솔직히 제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김기철기자 kimin@hk.co.kr
고성호기자 sung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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