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2월6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프란츠 파농이 미국 메릴랜드주 베세스다의 한 병원에서 백혈병으로 작고했다. 36세였다. 생전의 소원대로 그의 유해는 알제리에 묻혔다. 그가 죽은 이듬해 알제리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파농은 알제리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난 흑인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파농이 공책에 처음으로 받아쓴 프랑스어 문장은 '나는 프랑스 사람입니다'였다. 그는 프랑스의 리옹 의과대학에서 훈련을 받은 뒤 정신과 의사가 되었고, 대학 시절에 사귄 백인 프랑스 여성과 결혼했고, 죽을 때까지 프랑스 시민으로 살았다. '검은 피부, 흰 가면'(1954)에서 '땅 위의 저주 받은 자들'(1961)에 이르는 파농의 저서들은 흑인 부르주아 출신 청년이 분열된 정체성과 싸우며 헌걸찬 혁명가로 변하는 내면의 과정을 섬세하고 격렬하게 보여준다. 알제리인 정신질환자들의 진찰 경험을 통해서 파농은 식민주의의 폭력이 개인들의 마음에 낸 상처들을 섬뜩하게 읽었고, 그래서 식민주의와의 싸움을 자신의 라이프워크로 삼았다. 그가 보기에, 식민주의는 생각하는 기계도 아니었고 이성을 지닌 신체도 아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이고, 더 큰 폭력 앞에서만 항복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마르티니크 출신 흑인이 대서양 건너편 아랍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는 점에서 파농은 혁명의 국제주의를 실천했다. 그 점에서 그는 토마스 페인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후예였다. 그러나 그와 더 닮은 사람은 같은 세대의 혁명가 체 게바라일 것이다. 파농처럼 게바라도 실천적 국제주의자였고, 의사 출신이었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질병은 진료실에서가 아니라 사회 변혁의 과정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 종 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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