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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양평 섬이마을 "마을 지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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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양평 섬이마을 "마을 지키기"

입력
2002.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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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를 지나 귀가 먹먹해지는 고개(비슬재)를 넘고, 임도(林道) 같은 구불길을 40여 분이나 달렸을까. 그 사이 나고 드는 차 한 대를 구경하지 못했다. 길이 끝나고 산이 시작되는 곳에서 마주치는 오지마을. 경기 양평군 단월면 석산2리 '섬이마을'이다.섬이마을은 가마솥에 여물 쑤어 일소 키우고 봄이면 쟁기 지워 밭을 가는 60,70년대 농촌 풍광을 간직한 마을이다. 새마을운동도 비껴간 듯 옛 돌담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대다수 가구가 참깻대와 장작으로 군불 지펴 겨울을 난다. 주말 별장족을 제쳐두면, 마을 식구라고는 고작 16가구 30여명. 그나마 대부분 고령인데다 봉미산(해발 855m) 골짜기를 타고 집터들을 잡아 갈아먹을 땅이라야 한 눈에 담기는 다랑논이 전부다. 그래서 10년 뒤, 20년 뒤가 걱정이라고 했다. 마을 토박이 가운데 막내인 이장 박광오(58)씨는 "왕년에 화전 일구고 살 때는 60가구가 넘었지요. 이 골에서 만석 쌀이 나왔다는데 지금은 사람도 없고 대부분이 60대 이상입니다."

주민들이 사라지면 마을이 사라지고 외지인들의 별장촌이 될 터이다. "겉으로는 여기가 볼품없어 보여도 인심 좋고 참나무 장작에 이밥 안 끊기는 동넨디…."

그런데 이 마을에 최근 새 기운이 돋기 시작했다. 따지자면 2년 전 젊은 새댁 정민이 엄마(오충미씨·37)가 눌러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름 붙여 주민들의 '마을 지키기'가 시작된 것이다.

정민이네는 주말부부다. 지방자치단체 납품용 환경설비 사업을 하는 남편(39)은 이래저래 전국을 떠돌아야 할 팔자니 동네가 깊어 주말부부가 된 것은 아닌 셈. 우연한 기회에 이 마을을 알게 된 뒤 찾아 든 오씨는 10여년 전 문을 닫은 언덕 위 교실 두 칸짜리 학교(산대초등학교)에 기대를 걸고 있다. 1,500평 부지에 교실 2칸과 사택 등 부속건물 3채, 텃밭 400평. 오씨의 계획은 교실을 숙소로 꾸며 주말마다 사람들이 와서 숙식하며 텃밭에서 농사 체험도 하고 숲 길도 둘러보는 이른 바 '주말 들살이'.

오씨의 섬이마을 뿌리내리기도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못했다. 한 두 달 머물다 농촌 생활의 단조로움과 적막감을 못 견디고 짐을 싸는 이들을 심심찮게 보아왔던 터라 주민들은 쉬이 마음을 열지 않았다. 데면데면하던 주민들과의 관계는 하지만, 오씨 특유의 싹싹함과 붙임성에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정월 대보름 행사든 단오 잔치든 마을 일마다 앞장 서서 젊은 힘을 발휘했고, 틈틈이 이웃집 궂은 일에도 팔을 걷어 부쳤다. 명절 때나 아이 구경하던 주민들에게는 정민이(6) 형제의 재롱도 외면하기 힘든 유혹이었을 터. "젊은 것들이 빈 시골집 전세 얻어서 손 봐가며 살려는 게 기특했나 봐요." 오씨가 학교를 맡게 된 것도 '운'이 좋았다. 당초 폐교는 한 종교단체의 합숙시설로 이용됐으나, 마을과 궁합이 안 맞았던지 심심찮게 잡음이 일었고, 그러던 차에 오씨가 욕심을 내비쳤던 것. 마을의 '최고 의결기구'인 마을회의는 학교를 마을 공동 명의(임대료가 싸다고 했다)로 임대해 오씨에게 임대료 충당과 관리·운영 등 일체의 책임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 후부터 주민들과 오씨의 마을살리기 구상이 구체화했다. 지난 여름에는 학교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아마추어 국악인들을 초청해 작은 음악회를 열었고, 생태운동가 및 주민·외지 주부들과 함께 토종 김장담그기 행사도 벌였다. 수도권과 인근 지역 공동육아 모임이나 시민·환경단체 회원 등이 아이들과 함께 와서 교실에서 숙식하며 봄에는 두릅 뜯어 밥 해먹고, 여름에는 물장구치고 매미, 여치를 잡으며 몇 밤을 자고 갔다. 가을에는 추수체험, 겨울에는 물레질, 짚신삼기 학습 행사도 벌였다. 어느 프로그램이든 마을 노인 한 두 사람이 훈장 겸 실습교사로 나선다. 지난 해부터 그렇게 거쳐간 이들이 줄잡아 30여 팀 500여명.

내년부터는 프로그램을 체계화하고, 짜임새도 신경을 쓸 계획이다. "이른 봄 밭갈이 철에는 쟁기 소 끌면서 부르는 소몰이 농요를 해질녘까지 '오리지널'로 들을 수 있고, 겨울에는 군불 때서 콩 삶고 구들장에서 메주 띄우는 정경도 흔한 풍경입니다." 그래서 소문 듣고 찾아 드는 사진작가도 심심찮게 있다. 주민들은 "뒷산(봉미산·855m)에서는 해 걸러 '산삼'소문이 있고, 송이버섯도 제법 난다"고 했다.

오씨의 구상이라는 것도 마을의 전통과 정취를 밑천 삼아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환경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본격화하겠다는 것. "방문하는 팀마다 학교 뒷산 산책로에 한 평 짜리 집을 짓도록 하면 어떨까요. 문패도 만들어 달면 이 마을에 자기 집이 생기는 거잖아요." 나름의 농가소득 증대방안도 있지만 '비밀'이라고 했다. 주민들과 함께 여름이면 산에 지천으로 열리는 오디나 복분자를 모아 잼을 만들어보는 것도 작은 예라고만 했다.

"사람이 줄어든다고 아무에게나 들어와 달라고 조를 수는 없잖아요. 주민들과 뜻 맞춰 알콩달콩 살다 보면 사람들이 찾아 들고 뿌리 내리는 이들도 생기겠죠."

그는 당장 자신은 없지만 주민들이 도와주고, 새 동지(수민이네)도 얻어 내년부터 힘을 더 내 볼 참이라고 했다. "지금 이 대로가 좋은데 마을은 갈수록 작아지겠죠. 그 분들 계실 때 기반을 다져야 하는 데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아요."

마을 주민들은 "젊은이들이 더 들어와 살아주면 좋겠지만 여기가 너무 멀고, 깊어서…" 라고 말꼬리를 흐렸지만 젊은 사람들에게서 마을의 희망을 찾고 있었다.

/양평=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최흥수기자

■수십년째 이어온 대동곗날 주민들 "소박한 잔치"

"벌써 그리 됐네. 메주 삶을 끼 두 솥 넘게 남았는데 우짜꼬." 혼자 사는 사천할머니(78)가 느릿느릿 비탈길을 내려온다. 서울을 떠나 7년 전 고개 꼭대기로 이주한 이용말(62)씨 내외와 아들 며느리도 집을 나서고, 고갯길 중간에 사는 전재랑(61)씨도 마을회관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3일 오전9시. 이 날은 수 십년 째 이어져 오고 있는 대동곗날이자 마을기금 결산일. 예전 같으면 집집이 준비한 떡이나 나물, 고기, 밥, 술 등을 모아 먹으며 허벅진 잔치를 벌였을 날이지만 근래에는 당번을 정해 한 집에서 음식을 준비한다고 했다. 올해는 서울서 이사 온 정민이네(오충미씨) 부부가 당번. "정민이네가 재발라서 손 맛도 찰질 끼라요." 사천할머니의 말에, 평생 '미원 맛' 모르고 살았다는 우물집 할머니(84)도 "뭘 얼마나 차렸을꼬"하며 입맛을 다셨다.

이장 박광오(58) 씨의 기금 사용내역 발표는 주민들의 농사얘기, 송이버섯터 정보 교환 등 사담(私談)에 묻혀 중동무이. 권커니 잣커니 소줏잔이 돌고 이내 불콰해진 이들의 대화는 '마을 지키기'로 넘어섰다.

"비료포대 매고 들어와 개울가 개구리 싹쓸이 해가는 것들을 막아야 해" "아, 봄에 고사리 훑어가는 봉고차들은 어쩌구" "마을에 사람이 있어야 쓰는 디 늙은네들 뿐이니, 참" 탄식이 이어지면서 일부는 술판으로 일부는 화투판으로 자리를 다시 잡고, 술도 화투도 싫다는 이들은 "에이, 난 갈랴"하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회관 부엌에서는 소매를 걷어부친 아낙네들의 설거지와 식사가 한창이었다. 마을 주민이 오랜만에 모이는 대동곗날은 이렇게 떠들썩하니 깊어갔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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