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는 듯 보였던 풍화산업도 불황의 바람 앞에서는 기진맥진했다. 수출 부진에 경기 불황까지 겹치면서 의류 제조업체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기 시작하자 외국에서 원사를 수입해 공급하던 풍화산업도 어려움을 겪게 됐다. 하지만 풍화산업 박 사장은 이전 삼흥사 사장과는 조금 달랐다. 수익이 줄면서 회사가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과감하게 원사 수입 사업을 정리한 뒤 발빠르게 다른 분야 사업으로의 변신을 꾀했던 것이다. 입사 1년6개월여만에 회사가 문을 닫게 됐지만 삼흥사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쫄딱 망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 전에 스스로 문을 닫는 것이기 때문이었다.회사가 문을 닫던 날 박 사장은 "이 사업을 정리하긴 했지만 언젠가 다시 무역업을 할 테니 송 과장, 그때 다시 보자. 다시 만나서 멋지게 한번 일해 보자"고 용기를 북돋아줬다. 하지만 박 사장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아니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게 더 나았는지도 모른다. 내겐 '모나미'라는 다른 길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첫 실업자 시절보다 두번째 실업자 시절은 훨씬 여유로웠다. 돈도 꽤 모아놓은 상태였던 나는 내 진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수출입 업무에서 회계 업무에 이르기까지 기업 경영에 필요한 노하우를 어느 정도 체득한 상황에서 직접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싹트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내가 잠시 풍화산업 시절 아르바이트 일을 하다 알게 된 사람을 도와주고 있을 때 광신산업 이용섭 사장으로 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무역업계에서 능력을 인정받던 나를 상공부와 한국은행을 드나들며 익히 알고 있던 이 사장이 풍화산업의 폐업 소식을 듣자마자 여기저기 수소문해 연락처를 찾아냈던 것이다. 상공부 공무원 출신인 이 사장은 공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터였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회사 지분의 10%를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내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막상 유사한 상황에 부닥치니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나는 가진 돈도 없고, 회사를 경영할 만한 능력도 없다"는 부정적인 답변에 이 사장은 예상했다는 듯 "송형의 능력은 이미 알고 있다. 자금은 내가 댈테니 송형은 능력을 대라"며 더 적극적으로 나왔다. 그리고 지분 10%에 대해서는 "이회사를 송형 회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해 달라는 취지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자본과 능력, 자본과 경험을 합쳐 동업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나는 며칠 말미를 얻어 심사숙고했다. 광신산업은 서울 사무소 직원이 이 사장과 직원 한 명 뿐인 소기업이었다. 그런 작은 기업에 가는 것보다 아예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하는 게 나을지, 아니면 이 사장과 함께 '동업 아닌 동업'을 하는 게 나을지 며칠 고민했다. 나는 아직 사업을 시작하기에는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대신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대접해주는 이 사장과 함께 사업을 한다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비록 10%에 불과하지만 지분을 갖게 되는 만큼 광신산업은 내 사업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바로 모나미의 시작이었다.
돌이켜 보면 상공부 장관과의 만남, 장관 비서의 제안과 삼흥사 입사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마치 모나미와 나의 운명적 만남을 위한 서곡(序曲)이었던 것 같다. 장관 비서가 삼흥사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나는 공무원이 됐을 것이고, 삼흥사나 풍화산업이 문을 닫지 않았다면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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