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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내 일상의 고운 무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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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내 일상의 고운 무늬들

입력
2002.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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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고등학교 동기인 친구로부터 편지와 소포를 받았습니다. 편지의 사연은 이러했습니다.<이제 이 해도 한 달여. 세월의 흐름이 참 빠릅니다. 오늘 영화도 보고 책방에도 들렸습니다. 'i am sam' 어려운 사람들의 삶이지만 지극한 부성애와 더불어 이웃과의 풋풋한 정이 느껴지는 참으로 좋은 영화였습니다. 서점에 들러서는 소설가 박완서님의 산문집 '두부'를 두 권 샀습니다. 잔잔한 글과 진솔한 삶이 좋아서 였습니다. 권은 형에게 드리고자 해서입니다.>

소포를 뜯으면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물밀 듯 밀려왔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전쟁을 겪고, 그 전쟁의 상흔을 타다 남은 부지깽이처럼 삶의 한 끝에 달고 살아온 것이 우리네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진 연대기는 기술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 다 겪은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마치 맑고 따뜻하게만 살아온 것 같은 고운 결로 삶을 다듬으면서 그렇게 예순의 한 허리를 넘어 늙어 가고 있었습니다. 부럽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기조차 합니다.

어제는 동료 교수들과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하루 종일 대학원 학생들의 연구논문을 심사한 뒤끝이라 모두 어지간히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한 분께서 당신이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 있는 한 도서관에서 겪은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한민족들이 극동으로부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된 이야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포들이 그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신 끝에 그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한인들이 정착한 타슈켄트 대학의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이 무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한인들이 그 때 가지고 간 그들 조상들의 문집(文集)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본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던 이주 과정의 비극을 들을 때도 그것은 다만 아득한 옛날의 낯선 역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어가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녔던 것이 오직 그 문집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리고 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며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저는 소리 내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 선생님은 다시 눈시울을 적시셨습니다. 한동안 아무도 어떤 말도 잇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저 소박한 감동이 아니었습니다. 과장한다면 전율이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학문함의 책무'를 새삼 일깨우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게으름에 대한 무서운 질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와 아울러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준거에 의하여 확인되는 '학문함의 긍지'를 지니게 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그 후예들입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사회의식도 없고, 정치적 관심조차 버거운 듯한 이러한 투의 글을 쓰고 있느냐고 꾸중하실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 부담스럽습니다. 저도 잘 압니다. 대통령 선거일이 바짝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냉정한 판단과 분명한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모를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일상의 작은 감동이 억제 되어도 괜찮으리라고 전제하는 정치 과잉의 공동체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의 소박한 고운 결이라든지 역사 의식의 원형이라고 할법한 '존재의 순수성'에 대한 놀라움을 배제하든지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서둘러 친구에게 답서를 써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동료 교수의 연구실 불빛이 꺼질 때까지 저도 오늘은 늦도록 연구실에 머물러야겠습니다.

정 진 홍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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