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궤도차량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으로 국내의 반미(反美)감정이 거세지고 있다. 사안이 똑같지는 않지만 전 세계에서 반미 시위가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반미는 이제 국제사회에서 익숙한 풍경이 됐다. 반미는 이제 '글로벌 이슈'다. 지난해의 9·11 테러는 반미 표출의 가장 상징적이자 극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이후 더욱 강력해진 슈퍼 파워 미국의 외교·경제·문화적 일방공세와 세계화 정책은 지구촌의 반미를 더욱 증폭시키고 새로운 반미 세력을 등장시키고 있다.■잇따르는 대미 테러
반미 테러의 주된 표적은 중동 지역 미국인들이다. 최근에는 레바논(11월 21일 간호사 피살), 쿠웨이트(11월 21일 미군 2명 중상, 10월 8일 미군 1명 피살·1명 중상), 요르단(10월 28일 외교관 1명 피살) 등 전통적이고 온건한 친미 국가에서도 테러가 잇따르고 있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 맥도널드 점포에 대한 공격도 일상적이다.
중동을 벗어난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다. 11월 22일 콜롬비아 미 대사관 근처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고 10월 2일 필리핀 미군기지 인근에서 폭탄 테러로 미군 1명이 숨지는 등 동남아와 중남미에서 반미 테러가 잦아졌다. 이스라엘인이 운영하는 케냐의 호텔 폭탄차량 테러에서 보듯 친미 국가도 테러 대상이다.
유럽의 반미는 반전(反戰)으로 나타난다. 올해 5월 유럽 순방에 나선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맞은 것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모인 수만 명의 반전시위대였다. 이후 미국 주도의 대 테러전에 반대하는 시위는 수십만 명 규모로 조직화했고 내년 2월 15일 유럽 전역에서는 1,000만 명이 참가하는 초대형 반전 시위가 예정돼 있다.
■반미의 뿌리와 대 테러전
반미는 1950년대를 정점으로 과거에도 상당했다. 그러나 과거의 반미가 반제, 반독점, 반자본주의와 함께 한 느슨한 형태인데 반해 91년 옛 소련 붕괴 및 냉전종식 이후 유일 강대국 미국에 대한 반발은 보다 현실적이며 직접적이다. 특히 부시 행정부 들어 강경 위주로 치닫고 있는 대외정책에 대한 반발은 동반자 관계였던 독일, 프랑스 등 유럽마저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일방주의는 도를 더했다. 누구도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에 언제 또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겹쳐졌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모자라 전선을 이라크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로 확대하고 이에 동참하지 않는 국가는 곧 미국의 적이라는 이분법을 들이댔다.
미국의 일부 논객들이 이슬람의 반미와 미국 정책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며 이슬람 지도자들이 반미를 국민 호도의 수단으로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반미 토양의 대부분은 미국이 제공했다는 지적이 설득력이 있다. 친 이스라엘 정책 등 균형감각을 잃은 중동 정책, 봉건 왕정을 지지하는 태도와 도를 넘는 군사개입 등은 이슬람권에 오랫동안 앙금으로 남았다. 지금은 미국의 이라크전이 결국 이슬람 전체를 겨냥하고 있다는 위기감까지 팽배해 있다.
미국은 이슬람 과격 세력의 테러에 대해 '이에는 이'라는 처방을 내렸다. 아프간 전쟁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의 미군 주둔, 동남아시아에서의 대 테러전 지원 등이다. 최근 예멘에서 알 카에다 조직의 현지 책임자가 탄 차량을 무인전투기로 폭격해 암살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일방주의와 이중잣대
반미를 더욱 확산시키고 있는 것은 지구적 현안에 대한 미국의 일방주의 정책이다. 과거 일본과 유럽의 농업보조금을 비난했던 미국이 이제 자국 내 농업보조금을 확대하겠다며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수입 철강에 대한 관세 부과,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교토의정서 거부도 대표적인 일방주의적 외교 행태다. 코소보 공습 등에서 세계경찰을 자처했던 미국은 정작 역사적인 국제형사재판소(ICC) 설치와 관련해 자국민은 예외적으로 법정에 서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미를 휩쓸고 있는 반미 및 도미노식 좌파 집권은 미국이 강요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빈곤의 나락에 떨어진 데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스타인버그 미 조지타운대 아시아연구소장은 21세기에 미국이 초강대국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방해할 가장 큰 요소는 '오만'이라고 단언했다.
/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 美의 反美대책
9·11 테러 발생 1주년을 앞둔 9월 5, 6일 미 워싱턴 국무부에서는 20명 안팎의 미국 내외 저명학자들이 50여 명의 지역담당 외교관들과 머리를 맞댔다. 국무부 산하의 정보조사국이 전세계적 반미 정서의 뿌리를 살펴보고,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마련한 이른바'반미 대책회의'였다.
비공개로 진행된 데다 참석자들도 함구로 일관해 이틀 간 회의에서 어떤 진단과 대책이 내려졌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조지 W 부시 정부가 전세계에 울려 퍼지고 있는'안티-아메리카니즘(반미주의)'의 경보에 비로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부시 정부 출범 후 일방주의와 오만, 외교적 편협성으로 미국이 전세계의 적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이런 경계의 소리를 '거인 미국'의 패러독스쯤으로 치부하는 흐름이 강했던 게 사실이다.
빌 클린턴 정부에서 국가정보위원회 의장을 지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학장의 지적대로 "9·11의 참화는 미국 대외정책의 편협성을 깨우는 모닝 콜"이었지만, 오히려 부시 정부는 반 테러 전쟁의 와중에서 전세계에 적과 동지의 선택을 강요했다.
미 의회는 최근 미국의 대외 이미지 개선을 위한 홍보정책 강화를 정부에 주문했다. 미 하원은 7월 22일 국무부 홍보전략 제고 이슬람 국가 교환 프로그램에 대한 자금 지원 무슬림 대상 국제방송 확대 언론인 교육 및 자매결연 등에 향후 2년 간 2억 5,500만 달러를 지원하는 내용의 법안을 가결했다.
당시 법안을 주도한 헨리 하이드(공화) 의원은 "외국 언론에 비친 미국에 대한 묘사가 증오로 가득찬 느낌을 주고 있다"며 "전세계 많은 지역에 유포되고 있는 증오와 유언비어 속에서 미국의 진면모를 드러낼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국 정책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활동으로 반미주의의 거센 바람을 차단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미국의 오만함을 보여준다는 비판론도 나오고 있다.
반미주의에 대한 미국 대처 방식의 한 특징은 개별 국가마다, 사안마다 처방을 달리 한다는 점이다. 주한미군 등 전세계에 퍼져있는 주둔군 문제에 대한 대처 방식이 대표적이다. 미 워싱턴의 우드로 윌슨 국제센터의 한 연구원은 "주둔군 문제는 현지 주민들과의 개별적 마찰 측면에 국한하고, 외교정책이나 안보정책의 시각에서 접근하지 않는다는 게 미국 정부의 기본 입장"이라고 말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 세계 각국 對美태도 설문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 센터의 '2002년 세계인의 생각' 보고서는 그동안 현상으로 목격했던 세계 각국의 반미 정서를 통계 수치로 확인한 작업이다. 특히 이슬람 국가의 반미 감정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으며 서유럽에서도 반미 정서가 널리 확산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이 책임을 맡아 진행한 이번 조사에서 이집트와 파키스탄을 비롯해 요르단, 터키, 레바논 등 중동 국가들은 조사 대상자의 55∼75%가 미국을 싫다고 답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44%)과 방글라데시(47%)의 반미 감정이 높았으며, 대 테러전의 새로운 전장으로 떠오른 인도네시아는 최근 2년 사이 반미 인구가 14% 포인트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이라크전을 둘러싸고 미국의 일방적인 공격에 반대하는 독일에서도 2000년 이후 반미 인구가 17%포인트나 늘었다. 영국과 이탈리아도 조지 W 부시 정권 출범 이후 대미 우호 정서가 각각 8%, 6% 포인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나이지리아에서는 대미 우호 인구가 31% 포인트 늘었다. 냉전의 앙금을 청산하고 대 테러전에서 미국과 협력을 다지는 러시아에서도 미국에 대한 호감이 20% 포인트 이상 증가했다.
외국인들은 또 미국식 사고나 풍습이 확산되는 데 강한 거부감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슬람 국가는 말할 것 없고 프랑스(71%) 독일(67%) 등도 미국 문화 유입에 대부분 반대했다. 하지만 미국 문화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어서 베네수엘라(78%) 캐나다(77%) 폴란드(70%) 일본(74%) 코트디부아르(84%) 영국(76%) 등 모든 지역에서 고르게 미국 음악이나 영화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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