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당신인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할 수가 없다. 왜냐 하면 내가 왜 문학을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대답하지 못한다.
―이 가상적 대화 혹은 자문자답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문학적 수사법 치고는 너무 극단적이고 퉁명스런 대꾸로 들리는데….
―아니, 그게 내 진실이다. 만약 내가 일찍이 그 결정적 대답을 진리의 빛처럼 마주할 수 있었다면, 비록 두 눈은 그 눈부신 빛에 멀어버렸을망정, 필경 나는 우리 모두의 육체의 현들을 끝없이 떨게 하고 뇌 조직을 온통 뒤집어 엎어놓는 걸작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의 순간은 오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문학 속을 헤매고 있다.
―처음부터 뭔가 지나친 결벽증을 발동시키고 있는 것 같다. 이 자리에 응한 것은 어떻게든 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역설적이지만, 나는 내가 왜 문학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언젠가는 알기 위해서 문학을 한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다른 많은 분들의 멋진 대답이 신기하고 부럽긴 하지만, 나처럼 이런 경우도 있다고.
―예상 밖이다. 사람들은 자주 당신의 작품을 '소설에 대한 소설'이라고 지적한다. 그 지적은 당신의 작품에 소설(문학)이란 무엇이며 왜 소설(문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덧대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던가?
―작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디기 훨씬 이전, 문학에의 모호한 충동 혹은 욕망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던 무렵부터, 바로 그 모호함으로 인해 나는 이 치명적 질문의 덫에 걸렸었다. 그 후 끝없이 그 질문을 곱씹었건만 여태껏 대답은 구해지지 않았다. 아예 불치병이 된 것이다.
―당신의 문학이 모호한 충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나?
―내가 스스로 원해서 시작한 것이 아닌 내 삶이 어쩌다가 그냥 시작되었듯, '작가로서의 나' 역시 모호하고 애매하게 탄생했다.
―그처럼 모호함만으로, 문학에 대한 최소한의 전망도 확보하지 않은 채 과연 문학 행위가 가능한가?
―삶에 대한 전망이 없다고 삶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은가. 마찬가지 이치다.
―당신은 은연중 문학과 삶을 닮은꼴로 부각시키려 드는데….
―점점 더 그 이형동질성을 강하게 느낀다. '문학을 한다'는 것의 실존적 양태가 '삶을 산다'는 것의 그것처럼 하염없기 그지없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그래서 나는 삶 속에서나 똑같이 문학 속에서도 한없이 헤매는 모양이다. 쉰 살 나이에 이른 내 삶의 꼬락서니가 뭐 하나 달라지는 것 없이 언제나 지지부진이듯, 내 문학의 행방도 나란히 오리무중이다.
―구체적으로 그 둘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예컨대, 나는 불투명한 밖의 현실을 헤매며 시달린 심신을 안으로 이끌고 들어와, 그 모습 그대로 캄캄한 머리를 쥐어뜯고 푸석푸석한 몸을 비비꼬며, 이번엔 불투명한 상상을 헤맨다. 나는 현실 노동처럼 언어 노동을 한다.
―문학이 노동인가?
―문학을 '하는' 자에게는 지독한 노동이다. 물론 오로지 노동일뿐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고통스런 헤맴을 자학적으로 즐기기도 하고, 때로는 그 노동이 곧 유희인 듯한 환희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 역시 현실 노동의 경우하고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현실과 상상을 가른다는 것부터가 그 둘을 일종의 대립항으로 설정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가령 현실의 결핍이 우리를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는 식의 명제가 제기되는 것 아닌가?
―아마도 실제와 가상이라는 존재 범주 혹은 양태의 차이가 그 둘을 가르는 요인이리라. 그러나 선험적 차원에서 상상을 현실의 대립항으로 설정했다 하더라도, 일단 상상을 글쓰기라는 구체적인 문학 행위로 시작하고 나면, 그 행위는 이미 상상을 현실로 살아내고 있는 꼴이 된다. 그리고 현실의 결핍이 상상을 부른다면, 거꾸로 상상의 결핍은 현실을 부른다. 그 둘은 결국 맞물린 하나의 헤맴이 되는 것이다.
―아까부터 거듭 헤맨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렇다면 혹시, 당신이 말하는 그 소설 쓰기의 막막한 헤맴 자체가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최초의 문제에 대한 일련의 모색이라고 말할 수는 있는가?
―삶을 살 만큼 살아봐야 왜 사느냐를 그나마 짐작할 수 있듯이 문학을 한껏 해봐야 비로소 왜 문학을 하는지 얼마만큼이라도 깨우치게 되는 건 아닐까, 문학 행위가 바로 문학에 대한 질문이자 대답의 과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스치긴 했었다.
―다시 그렇다면, 이때까지 해온 소설 쓰기의 축적 과정 속에서 다만 어느 정도라도 그 대답에 대한 단서들을 구할 수는 없는가? 그 헤맴이 정녕 모색이었다면, 그 동안의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대답을 향해 나아간 어떤 진전이 있지 않았겠는가?
―그 반문은 솔직히 두렵다. 헤맴이라고 했으나, 그 헤맴이 실상은 제자리를 맴돈 데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한편으론 의심스러운 탓이다. 마치 지옥의 미로 속에 갇힌 듯이 말이다. 실제로 진전의 이정표들이 아직 내 눈엔 띄지가 않는다.
―적극적인 이념적 또는 이론적 나침반을 먼저 구하면 해결될 문제가 아닐까? 그러면 방향 감각이 생기지 않겠나?
―아니다. 그런 방향 감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뒷걸음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헤매고 맴도는 게 힘겹고 지겹긴 하지만, 무조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수평적 전진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한 점을 빙빙 도는 나사가 깊이로 파고들듯 수직적 심화를 얻는 데 기대를 거는 게 낫다.
―뭔가 지독한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편견이라도 할 수 없다. 한 번 사는 삶에 한 번 하는 문학이니 아무튼 선택을 해야 하는데, 이념이나 이론은 모든 것을 단순화시키고 도식화할 위험이 너무 크다. 그리고 일단 그러고 나면 대개 신념이나 아집만 남고 치열한 사유와 상상은 사라지기 십상이다. 그건 자기기만에 빠지는 첩경이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드물긴 해도 당신 역시 소설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이고 이론적인 언술로 자신의 문학적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었던 까닭이다.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건 내 문학 행위의 작동 원리로서가 아니라 내 문학 행위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방어 활동으로서 그랬다는 게 더 옳다.
무엇에 대한 방어 활동이란 말인가?
―내 문학은 늘 같은 자리를 맴돌았는지 모르지만 내 문학을 둘러싼 상황은 변해왔는데, 그 변화가 문학의 존재 자체에 심각한 위협으로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디지털 매체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진술들은 매우 수세적이고 소극적인 부정어법의 소산이다.
―부정 어법이라면 가령 어떤 걸 말하는가?
―가령 소설은 이야기가 아니다(소설은 이야기를 '다루는' 고도의 상상적 방법이다), 소설은 영화가 아니다(소설은 시각적 영상이 아니라 언어를 매개물로 쓴다), 그런 식이라는 뜻이다. 아무튼, 문학은 이래야만 한다는 주장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부정을 통해 결국은 긍정에, 적극적인 주장에 도달하는 것 아닌가?
―반복하지만, 그것 선택의 문제다.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저항으로서의 최소한의 부정이면 족하니, 그런 선택은 거부하겠다.
―지면이 다 되었다. 마지막으로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나는 나도 모르게 끝내 분류되지 않는 문학, 정의되지 않는 문학을 꿈꾸어 왔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온다. 혼돈 속에서 혼돈스러워도 그 혼돈 전체를 문학으로 끌어안고 싶다고나 할까.
―그게 정녕 가능한가?
―과연 가능한지는 어차피 모르고 시작한 길이다. 나는 그래서 내 삶이나 문학을 내기라고 본다. 확신은 없지만 끝까지 걸고 밀고 나가야 할 내기라고.
―그 말을 듣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으니, 갈 데까지 가보랄 수밖에. 그나 저나, 대화가 줄곧 너무 딱딱했던 것 같다.
―이번엔 가급적 말을 건조하게 하려던 게 전략이긴 했는데, 막상 마무릴 이렇게 짓자니 독자들께 죄송하다.
● 연보
1953년 서울 출생
1977년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80년 계간 '문학과지성'에 중편소설 '낯선 시간 속으로' 발표 등단
1989년∼현재 서울대 불문과 교수
2001년 계간 '문학·판' 편집인
소설집 '낯선 시간 속으로' '한없이 낮은 숨결' '강 어귀에 섬 하나' 장편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산문집 '식물성의 저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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