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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워치]미국 앞에 작아지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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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워치]미국 앞에 작아지는 사회

입력
2002.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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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 사망 사건' 논란의 본질은 미국이 주둔군지위협정(SOFA) 등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책임자 처벌을 회피한데 대해 많은 한국민이 분개하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의 뒤늦은 유감 표명이 소용없는 것은 그들이 도대체 한국민의 생명과 자존심과 정의감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런 본질을 외면하고서는 '반미'가 거세게 회오리치는 사태를 수습하기 어렵다.미국은 사고를 낸 부교(浮橋)탑재 장갑차(AVLB) 관제병과 운전병에 대한 군사재판 배심원단이 무죄 평결을 한 것은 적법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한국민이 반발하는 것은 사법 체계와 법문화 차이에 대한 이해 부족 탓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오만할 뿐 아니라, 기만적 논리에 바탕하고 있다.

배심원단은 장갑차 바깥을 내다보는 관제병은 운전병에게 사고 위험을 알렸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평결했다. 또 시야가 제한된 운전병은 이런 경고를 받지 못했기에 역시 책임 없다는 엇갈린 항변을 받아 들였다. 당초 의심된 통신장비 결함 여부를 떠나, 모두 중대한 잘못이 없었다는 것이다. '모호하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법언(法諺)에 충실한 평결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군 당국의 기만성은 사고 차량에 앞서 가던 다른 장갑차 운전병이 정확하게 지적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복무하는 조슈아 레이 상병은 미군 신문 기고에서 사고 책임이 차량 대열을 잘못 지휘한 중대장 메이슨 대위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대장이 넓은 문산 우회도로를 두고 장갑차 너비보다 차로가 좁은 편도 1차선 지방도로로 부대를 무리하게 이동시켰으며, 사전 정보 없이 도중에 다른 장갑차 대열과 마주쳐 좁은 길에서 교행(交行)하도록 한 점 등을 사고 원인으로 적시했다. 갓 길에 간신히 비켜 선 여중생들을 칠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미군범죄수사대 수사관도 사병들의 재판에서 메이슨 대위의 기소를 군 검찰에 제안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군 검찰은 그를 기소하지 않았고, 배심원단의 증인 채택 요구는 재판장이 기각했다. 결국 미군은 무죄 평결이 예상되는 사병들만 기소하고, 지휘 책임이 무거운 지휘관은 일부러 기소하지 않은 셈이다. 미군 당국은 지휘관들을 행정 조치했다고 밝혔으나, 구체적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런 경위에 비춰 문제의 핵심은 미국이 인명 존중과 사법 정의 등에 관한 그들의 기준을 이 땅에서는 도무지 지키지 않는 데 있다. 탱크 같은 중장비 대열을 아무런 안전 조치 없이 제멋대로 몰고 다니고, 사고 책임은 특권적 지위를 이용해 회피하고, 항의 시위에는 단호한 대응을 경고하는 따위의 방자함이 갈등을 부추기는 것이다. 레이 상병은 농민과 아이들이 빈번하게 통행하는 도로를 빠르게 이동하면서 보행자들을 배려하지 않았다면서, 만약 미국에서 이런 사고가 났다면 지휘관은 엄중 문책 받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SOFA 개정에 앞서 이런 의식과 행태부터 고쳐야 한다. 또 이제라도 사고 책임자를 제대로 가려내 처벌하고, 한국민의 용서와 이해를 진정으로 간곡하게 구해야 마땅하다.

물론 이런 기대는 쓸모없는 것이 될 공산이 크다. 정부와 정치권이 모처럼 바른 소리를 하는 듯 하지만 잠시뿐일 터이고, 미국의 기만적 논리를 충직한 앵무새처럼 복창하는 지식인들이 버젓이 행세하는 사회를 미국이 새삼 존중할 리 없다. 어쭙잖은 지식과 낡은 안보 논리로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이 한심한 지식인들은 반미 시위에 불만을 표시하는 미군을 정부가 다둑거려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미군이 철수라도 하면 어떻게 할거냐고 협박마저 서슴지 않는다. 미국이란 존재 앞에서는 지식과 양심과 자존 따위가 모두 쓸모없이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는 의식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 사회는 '여중생 사망사건'의 분노와 굴욕을 굴레처럼 지고 가야 할 것이다.

/강 병 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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