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헝가리 작가 케르테스 임레(73·사진)의 장편소설 '운명'(다른우리 발행)이 번역출간됐다. 케르테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복역하는 15세 소년 죄르지의 이야기다. 작가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과 같은 나이에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을 경험했다. 직접 겪은 수용소 체험을 두고 "쫓아버리고 싶지만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돌아서면 뒤에서 물어뜯는 기억"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이 아름다운 강제수용소에서 좀 더 살았으면 좋겠다." 굶주림과 노동, 학살의 장소인 수용소에서 유대인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죄르지에게 가축운반용 화물열차를 타고 수용소로 가는 길은 보이스카우트 캠프를 떠나는 길과 같다. 몸이 부서질 것 같은 노동을 끝내고 겨우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온종일 굶다가 느지막한 저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받았을 때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인류의 상처로 기억되는 이곳에서 소년은 '전쟁에 필요한 중요한 일을 한다'는 확신을 갖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고통을 행복한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묘사는 섬뜩하다. 소년은 현실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수용소 논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독자들에게 직접적인 보고 형식보다도 더욱 큰 분노를 솟게 한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다"는 소년의 말은 거꾸로 수용소 체험이 얼마나 끔찍했던 것인지를 고발한다. 소설의 원 제목은 '운명 없음'이다. 이것은 소설 속 죄르지의 목소리다.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그것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 아닐까."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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