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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시니어] 하이텔 "원로방" 회장 강 태 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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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시니어] 하이텔 "원로방" 회장 강 태 원씨

입력
2002.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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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쉬2라고 동화상을 만들어 주는 프로그램이지. 이걸 배워서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일본에 있는 애인에게 애니메이션카드를 보낼 계획이야." 강태원(82)씨는 지난달 18∼23일 서울 동숭동 하이텔교육장 'on and off'에서 두꺼운 돋보기 안경 너머로 매뉴얼과 컴퓨터 모니터를 번갈아 보면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배우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었다. 국내 유일의 노인동호회 하이텔 '원로방'의 회장인 그는 실버세대의 인터넷전도사이다. 1992년 12월에 생긴 '원로방'의 창립멤버로, 노인들에게 컴퓨터 사용법을 알리기 위해 발로 뛰면서 애써온 공로자이다.'원로방' 창립 당시 60세 이상으로는 유일한 회원이었던 그는 동호회를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유경희(인터넷 집현전 회장·하이텔 자문위원)씨와 함께 '회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먼저 노인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쳐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인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고 지역별 원로방을 개설, 현재 1만7,000여명의 회원을 확보했으며 지역별 공동체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컴퓨터를 통해 주로 하는 일은 글 쓰는 일. 서울 토박이인 그는 70년이 넘도록 지켜 보아온 서울 구석구석의 변화상과 사라져가는 풍물을 감칠 맛 나게 글로 옮긴 '추억의 책장'을 수년 간 원로방에 연재, '얼굴 없는 인기작가'로 사랑을 받았다. 이 글들을 모아 1994년 '서울에 살어리랏다'를 출판했고 서울정도 600년 기념 행사의 하나로, '자랑스러운 서울시민상'을 수상했다.

강씨가 처음 컴퓨터를 접한 것은 1990년, 70세가 되던 해였다. 고희잔치상을 받으면서 강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심한 끝에 "이제부터는 내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동네사람들의 '인생상담소' 역할을 해온 복덕방을 처분하고 동네 컴퓨터학원에 등록했다. 앞으로는 컴퓨터 세상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가정주부들 사이에 앉아 아래 한글과 베이직, 데이터베이스 등을 배우면서 컴퓨터가 크게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늙으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내던진 덕분이었다.

강씨의 학력은 국졸. 서울 변두리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게 점원, 음식점 배달,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어려운 형편을 원망해 본 적은 없다. 타고난 낙천가였던 셈이다. 그는 "오히려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덕에 남들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도 배우지 않았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으니, 언제나 기회가 닿으면 배워야 한다'는 것이 어려운 환경에서 키워온 신념이다. 어른이 되면 남을 가르쳐야 한다거나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배운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컴퓨터의 국내 보급 시기와 거의 비슷해 그는 컴퓨터 기종을 두루 섭렵했다. 하드디스크가 없이 플로피디스크를 집어넣었다 빼는 286컴퓨터가 일년이 안 돼 386으로 바뀌었다. "OS도 처음에는 도스를 배웠는데, 이젠 윈도세상이 됐지. 윈도95, 98를 거쳐 XP까지 나왔으니, 컴퓨터만 배우고 있어도 늙을 새가 없지."

컴퓨터가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자동차 만드는 법은 모르지만 누구나 운전은 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 프로그램은 못 만들더라도 필요한 만큼 배워서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3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상계동 주공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지만 컴퓨터가 있기 때문에 적적하지 않다. 요즘 주로 시간을 쏟는 것은 한국고전을 일역해 일본 통신사이트에 띄우는 것. 일본 노인동호회 'Fmellow'에 '백두산'이란 아이디로 '사씨남정기' '숙영낭자' 등 한국의 고전을 일문으로 번역해 올리고 있다. "일본에 한국의 고전을 알리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있다"는 그가 올 초 건강이 나빠져 잠시 집필을 쉬게 됐을 때 많은 일본인 팬들이 '어서 건강을 되찾으라'는 안부 메일을 띄워주었다.

저녁식사를 마치면 MS메신저에 들어간다. 기다리던 일본인 여자친구(70)와 Fmellow회원들이 즉시 안부를 물어온다. "혼자 산다는 게 적적할 때도 있지. 하지만 4남매가 사는 미국이 먼 곳도 아니고…. 지금은 번잡함을 피하면서 내 일을 하는 것이 즐거워." 그는 하루 담배 한 갑 이상을 피우고 엷게 뽑은 커피는 한 주전자를 마신다. "건강에 좋지 않다고? 이건 좋고, 저건 나쁘고 하는 고정관념이 건강에 더 나쁜 거야."

/김동선기자 weeny@hk.co.kr

● 노인동호회 사이트 "원로방"은

'신술 걸러내어 밉도록 먹어보세/쓴나물 데워내어 다토록 씹어보세/굽격지 보요박은 잣징이 무되도록 다녀보세(정철). 건강을 위해서 소찬과 운동이 꼭 필요합니다'

'전번 모임에서 뵌 김선생의 모습에 감복했습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앙탁드립니다'

국내 유일의 노인무료사이트 '원로방'에 올라온 글들은 인터넷이 '쓰레기로 오염된 바다'라는 오명과는 거리가 멀다. 60세 이상 회원 1만7,000여명이 가입해 있는 이 곳은 PC통신 사이트가운데 가장 수준높은 사이트중의 하나다. 회원들은 대부분 고학력 지식계층이어서 서로 부르는 호칭도 '도암선생''남정선생'등이다.

회원들이 자유롭게 글을 올려놓는 '노변정담'에는 한시, 최근 읽은 책들의 인용구, 점잖은 세태비평, 정치평론 등이 오른다. 기복많은 인생을 살며 얻은 깊은 관조나 나름대로의 인생관도 회고담과 함께 올라온다. 약어 문법파괴가 예사인 통신언어와 달리, 한자와 고사성어가 섞인 격조높은 문장이다.

새로 배운 프로그램을 이용, 한국의 풍속화나 자신이 찍은 사진을 동영상으로 올려놓기도 한다. 1992년 12월 창립된 '원로방'은 올해로 딱 10년째. 전국 15개 지역원로방, 6개 직능원로방, 3개 소모임으로 나뉘어져 활동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 바둑, 등산 등 취미동호회를 만들어 오프라인 모임도 활발하다. 13일 서울 송파구 송파 여성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원로방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에는 전국 회장단 및 지역 대표들 250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원로방 운영에 공이 컸던 회원에게 주는 공로상은 최고령회원인 정규복(94·대구)씨와 한만희(71) 박제경(75)씨 등이 받게 된다. 대구사범고 1회 졸업생인 정씨는 초등교사 시절의 회고담을 정갈한 문장으로 게시판에 올려 다른 회원들의 찬사를 받았다.

/김동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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