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부실 기업대출로 호된 시련을 겪었던 금융기관들이 이번엔 자금운용의 '피난처'로 여겼던 가계대출의 부실화로 '제2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미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상황에서 정부가 가계로 향하는 '돈 줄'을 급작스럽게 조이면서 돈을 빌린 가계와 빌려준 금융기관이 동반 부실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용난민 급증→부실채권 증가→금융기관 경영 악화→금융시스템 붕괴'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금융권 부실화 급속 확대
"아직은 괜찮다"는 정부와 금융기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부실화의 징후는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은행권 가계대출(신용대출+담보대출) 연체율은 지난해 말 1.21%에서 10월말 1.63%로 급증했고, 신용카드 부문(작년 말 7.38%)은 올 9월말 11.19%, 10월말 11.41%로 매달 신기록을 내고 있다.
'부실의 진원지'인 카드업계의 경우 LG와 삼성을 제외한 대다수 업체들이 3·4분기 들어 월별 적자를 기록하는 등 수익성이 급속도로 악화하고 있다. 국민카드는 10월 한달간 292억원의 적자를 냈고 외환카드는 8월 적자(82억원)로 돌아선 뒤 9월에는 적자폭이 무려 252억원으로 불어났다.
은행권에서도 이미 상당수 은행이 카드계정에선 월별 적자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조흥은행은 6∼9월 중 4개월 연속 카드계정 적자를 냈으며 기업은행도 8,9월 두달간 적자를 기록했다. 가계대출 및 카드 부실화의 여파로 시중·지방·특수은행 20개의 올 3·4분기 당기순이익(1조3,463억원)은 2·4분기에 비해 23%, 1·4분기에 비해 42% 급감했다.
■가계 빚, 감당 가능한가
이 같은 가계 빚 부실화의 시발점은 환란 후 경기 활성화를 명분으로 한 정부의 저금리정책과 은행권의 대출경쟁이다. 2000년말 총 118조원이던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은 올들어 매달 4조∼7조원씩 늘며 10월말 현재 212조원으로 불어났다. 카드 빚과 할부구매 등을 합친 총 가계 빚은 최근 400조원을 돌파했다. 문제는 이 같은 절대 금액이 아니라 소득이나 자산에 대한 부채의 수준이다. 우리나라 가계의 경우 금융부채 대비 금융자산 비율이 2.22배(6월말 기준)로, 4.2배인 미국과 3.7배인 일본(각각 2000년 기준)보다 낮아 금리 인상 등 시장상황 급변시 감당능력이 훨씬 떨어진다. 가계 빚 대비 연간 개인가처분소득 비율도 올해 100%를 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 가구가 1년 소득을 고스란히 빚(원리금)을 갚는 데 써도 모두 털어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금융시스템 위기로 이어질까
문제는 경기가 하강해 부동산 등 자산가격 거품이 꺼지거나 금리가 급등할 경우 가계의 빚 감당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데 있다. 경기가 급속도로 냉각되면서 집값마저 급락하면 담보가치 하락으로 금융권이 대출회수에 나서고, 서민들은 한계상황에 내몰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경우 '가계부실 급증-→금융기관 부실화→가계·기업에 대한 대출회수→신용경색·소비위축→경기침체 가속화-→금융 시스템 위기'의 악순환 구조로 빠져들 수 있다. 80년대말 주택 값이 폭락하고 금리가 단기간에 치솟으면서 장기불황에 빠진 일본식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셈이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더 늦기 전에 금융기관들이 가계대출의 위험성을 깨달은 만큼 가계발(發) 금융위기 가능성은 높지 않다"면서도 "그러나 국내외 경제여건이 예상보다 나빠질 경우 금융기관들은 '대출 남발'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대희기자 dhnam@hk.co.kr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신규 신용불량 90% 카드때문
신용카드가 개인 신용불량자 양산의 '주범'인것으로 조사됐다.
2일 금감원과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올 8월 이후 매달 7만여명씩 양산된 신규 신용불량자 중 90%에 달하는 6만5,000여명이 신용카드 때문인 것으로 추정됐다.
신용카드 물품구입 대금 연체 및 현금서비스 연체로 인한 신용불량 등록건수는 지난해말 58만5,000건에서 올 10월말 현재 95만1,000건으로 62%(36만6,000건)나 증가했다. 이는 전체 신용불량 등록건수 증가율 29.9%에 비해 배이상 높은 수준이다. 또 대출금 연체로 인한 신용불량 등록건수도 144만건에서 209만4,000건으로 65만4,000건(45.4%) 늘었으며 이 중 대부분이 카드론 등 신용카드 관련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에 따라 신용카드사의 신용불량자는 작년 말 71만9,000명에서 지난 10월 말 102만명까지 무려 30만1,000명(41.8%)이나 늘었다. 국내 은행의 신용불량자도 18만명 이상 증가했는데 역시 상당수가 신용카드 때문이라는 게 은행권의 추정이다.
/변형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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