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인 '청년백서'의 표현을 빌자면 "영화는 영화일 뿐, 기분 나빠하지 말라" 쯤 된다. 지금 이 말이 가장 절실하기는 '007 어나더데이'(12월31일 개봉)의 한국배급을 맡고 있는 이십세기 폭스코리아일 것이다. 미군 궤도차량 여중생 사망사건과 미군 법정의 무죄판결에 따른 반미시위가 시작되면서 불똥이 영화에도 튀고 있기 때문이다.이 영화는 무대가 한반도이고, 세계를 파멸시키려는 악당의 심복으로 북한군 특수요원 자오(릭 윤)가 나온다. 아직 국내에서는 시사회 한 번 하지 않았는데도 벌써 어떻게 알았는지 네티즌들은 '(한국 묘사가) 70년대 서울을 보는 듯하다' '동남아보다 못사는 모습' 등 영화의 장면을 거론하며 "보지 말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배급사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영화는 영화로 보자"고 호소하는 것 뿐이다. 미국 본사의 공식 입장도 "007시리즈는 액션과 어드벤처, 판타지가 어우러진 영화며 절대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주성 폭스코리아 대표는 "007시리즈에는 수많은 악당이 나왔다.
이번에도 자오는 개인적인 악당일 뿐이다. 북한정부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로 나오는 북한 장군은 평화주의자로 나온다"고 강조했다. 더구나 릭 윤 등 한국인으로 나오는 배우들의 서투른 한국말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줄까봐 국내 성우들로 더빙까지 했다.
그러나 아무리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해도 사회분위기에 따라 관객의 감정은 달라진다.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평소 재미있게 보던 테러영화도 현실에서 9.11 테러가 일어나자 미국인들은 보기를 싫어했다. '콜래트럴 데미지'는 개봉까지 연기했다. 007시리즈도 마찬가지다. 구 소련이나 중동이 적으로 설정됐을 때는 우리 관객들도 부담없이 즐겼다.
11월24일 미국에서 개봉한 '007 어나더데이'는 첫 주말 박스오피스 1위(4,707만달러)를 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사측은 현란한 액션에 올해 흑인 여배우로는 처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할리 베리의 섹시한 연기가 요인이라고 말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부시 정부가 적으로 삼고있는 북한이 '악당'으로 나오기 때문임도 부인할 수 없다.
대조적인 사례도 있다. 조엘 슈마허 감독의 '폰 부스'(사진)이다. 이 영화는 11월15일 미국에서 개봉할 예정이었으나 10월2일부터 워싱턴을 중심으로 영화의 상황과 너무나 비슷한 무차별 연쇄 저격사건이 일어나 미국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자 무기연기해 버렸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예정대로 2월14일 미국보다 빨리 개봉한다. 지금과 같은 반미 분위기와 감정이라면 어쩌면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둘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영화 모두 이십세기 폭스의 것이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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