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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록](9) 시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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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록](9) 시나위

입력
2002.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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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헤비 메탈이 세계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70년대의 하드 록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훨씬 강하고 자극적이었으며 기타의 비중이 큰 음악이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입시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며 점점 강한 자극을 추구하던 중고생들에게 헤비 메탈은 더없이 좋은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었다. 86년 시나위가 한국 최초의 헤비 메탈 곡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들고 나오자 그 열기는 고스란히 이어졌다. 무명 신인 밴드의 음반이 30만장 넘게 팔렸다.시나위의 음악은 당시 기준으로는 낯설기 짝이 없었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비롯해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 등 음반의 8곡 전부가 가사만 한국말이었을 뿐 기타가 전면에 나선 완전한 헤비 메탈이었다. 불과 이틀 만에 녹음을 마친 탓에 사운드는 조악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신중현의 아들이라는 후광도 있었지만 기타리스트 신대철(36)이 보컬보다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도 장르적 관습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신대철과 고등학교 동창인 임재범의 보컬도 그 전까지 누구도 구사하지 않았던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다. 신대철은 "헤비 메탈을 아는 엔지니어가 없어 외국 밴드의 원판을 구해다 주고 공부를 시켜 녹음했을 정도"라고 말한다. 하지만 헤비 메탈에 익숙한 세대들에게는 반갑기만 했다. 경외심을 갖고 듣기만 했던 헤비 메탈을 한국 밴드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충족시켰다.

시나위를 조직한 신대철도 헤비 메탈 세대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 록에 눈을 뜬 그는 "10대 때 처음 들은 헤비 메탈은 이전에 듣던 음악과는 달랐다. 한 마디로 젊음을 불태우는 거였다"고 말한다. 아는 이들과 모여 밴드를 만들었을 때 고민 없이 헤비 메탈을 택했다. 시나위의 상업적 성공은 헤비 메탈 붐을 이끌었다. 부활 블랙홀 블랙신드롬 H껵0 백두산 아시아나 등 헤비 메탈에 뿌리를 둔 밴드들이 줄줄이 데뷔했다.

시나위의 등장은 록에도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음을 알렸다. "가요를 할 생각보다는 헤비 메탈이라는 장르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는 신대철의 말처럼 이들은 처음부터 특정 장르를 지목하고 그것에 통달한 프로 뮤지션을 지향했다. 장르 구별에 민감하지 않았던 바로 전세대의 아마추어리즘과는 다른 생각이었고 듣는 이들에게도 그것이 통했다. 또 대학생이 되어야 밴드를 하는 것으로 알았던 70년대의 캠퍼스 밴드들과는 달리 이들은 경제적 풍요 덕에 고등학교 때 이미 음악을 하겠다고 나선 하이 스쿨 밴드 세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의 록, 헤비 메탈 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시나위도 첫 음반이 나오자마자 임재범이 군에 입대한 것을 비롯해 신대철을 제외한 멤버가 계속 바뀌었다. 그 중에는 4집에서 베이스를 쳤던 서태지와 2집, 4집에서 보컬을 맡았던 김종서, 후일 H2O와 삐삐 밴드를 조직한 강기영도 있다.

신대철은 "음반이 많이 나가도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었고 그나마 92년 서태지 등장 이후로는 모두 댄스를 한다며 떠났다"고 말한다. 음악적 편중이 심각하고 음반과 밤 무대와 방송의 비중이 지나치게 비대한 가요계에서 음반과 콘서트라는 정상적인 루트만을 고집했던 헤비 메탈 밴드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결말이었다.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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