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의 대미감정에는 세대차이가 있다.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우리의 혈맹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반미감정을 갖더라도 혈맹이라는 인식을 180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세대는 보다 객관적으로 한미관계를 보고 있다.나는 8살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 마을 뒷산에서 미군 병사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본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미국이 원조해 준 분유와 밀가루, 디디티도 잊지 않고 있다. 고마운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군에게 겁탈당할 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락에 숨어있던 젊은 여자들도 생각난다.
나의 대미감정은 복합적이지만 우호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낀다. 반미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는 것은 당연하다. 미군 초소에 화염병을 던진 것까지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런 과격시위를 포함한 전국적인 반미 데모 없이 부시 대통령의 사과가 나왔을까.
지난 6월13일 의정부에서 여중생 2명이 미군장갑차에 치어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시민단체들은 미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경위가 어찌됐든 타국민의 죽음에 대해 적절한 유감 표시를 해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한국인들의 생각이었다. 2년전 일본 오키나와에서 미군이 여학생을 강간했을 때 클린턴 대통령이 직접 사과했다는 전례가 거론됐다.
그러나 미 당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은 명백한 범법행위였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공무 중에 일어났고 아직 누가 잘못했는지 가려지지도 않았다. 대통령이 사과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건발생 6개월만에 절대로 할 수 없다던 대통령의 사과가 나왔다. 여학생을 치어죽인 장갑차 운전병 등 2명은 지난달 미 군사법정에서 무죄평결까지 받았는데, '공무중 일어난 죄없는 행위'에 대해 미국 대통령이 사과를 했다. 지금까지의 주장과는 다른 자세다.
미 당국은 무죄평결에 대한 한국민들의 반발이 확산되자 한미간의 사법체계의 차이, 문화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려고 무슨 노력을 했나. 여학생들의 죽음에 미 대통령이 조의를 표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 미국은 어떤 고려를 했나. 인간의 죽음 앞에서 공무니 뭐니 따지는 것이 그렇게 중요했나.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자녀의 죽음은 어떤 것으로도 보상될 수 없으며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미국 배심원들은 병사들에게 형사적 책임이 없다고 평결했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책임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미국은 한국민의 슬픔과 상실감을 잘 알고 있으며 두 어린 소녀의 죽음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허바드 미 대사는 부시대통령의 '슬픔과 유감'을 전하며 이런 성명을 낭독했다. 너무나 당연한 이런 인사를 하는데 6개월이 필요했다면 미국의 오만함은 이미 상식을 넘었다. 이렇게 되면 '혈맹'에 대한 한국인의 인내도 한계에 이를 수 밖에 없다.
왜 그들은 미국을 미워하나(Why They Hate America?)가 9·11 이후 미국의 화두가 되었다. 미국은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고, 수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런데 그들은 왜 미국을 미워하나. 왜 9·11같은 테러공격이 자행되고 세계에서 반미시위가 그치지 않나.
미국의 한 유력지는 "중국이 한국의 제1 수출국이 된 후 미국에 대한 한국의 충성심이 중국으로 옮겨가고 있는 과정에서 반미감정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것은 빗나간 분석이다. 한국의 반미감정은 오랜 세월에 걸쳐 쌓여 왔다. 의정부 사건은 지금까지 미군이 저질렀던 수많은 사건의 악몽을 되살리면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대한 적개심을 폭발시키고 있다.
"한국군이 동티모르에서 군사훈련 도중 동티모르 소녀를 치어죽게 했다면 한국군 장병들이 동티모르 법정에서 재판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한 미국인은 신문 칼럼에서 묻고 있다. SOFA 개정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님을 시사하는 질문이다.
내년이면 한미동맹 50주년을 맞는다. 한미동맹 50년을 돌아보며 서로의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진지한 접근을 해야 한다. 그 진지한 노력 위에서 SOFA도 재검토해야 한다. 오만함이나 비굴함은 모두 한미관계의 적이다.
/본사 이사 msch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