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가계대출 규제와 금융권의 신용카드 거래제한 조치의 여파로 제도권 금융기관을 이용할 수 없는 '신용난민'이 급증, 서민가계의 파산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내수부양을 위한 가계대출 확대경쟁의 '최대 고객'이었던 서민들이 이젠 금융부실의 주범으로 지목돼 제도권에서 쫓겨나고 있는 것이다. 가계발(發) 신용위기의 우려를 높이고 있는 신용난민의 증가실태와 문제점, 대책등을 3회에 걸쳐 시리즈로 진단해본다. /편집자주
빚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김모(28·여·유통회사 직원)씨가 난생 처음 카드 현금서비스를 받은 것은 2년 전. 홀어머니가 뺑소니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뒤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카드 신세를 지게 됐다. 70만원, 80만원씩 빌려 쓰기 시작한 카드 빚은 정말 순식간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치료비와 약값, 생활비를 위해 5∼6개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다 보니 요즘엔 사채까지 빌려 간신히 카드 결제일을 맞추는 신세가 됐다. 월급이 100만원도 채 안 되는데 매달 지급해야 하는 원금과 이자만 160만원. 그나마 연체액이 쌓인 일부 카드는 사용 정지될 판이어서 조만간 돌려막기마저 불가능해질 운명이다.
올 8월 부인과 합의이혼을 한 이모(45)씨. 외환위기 이후 직장을 나와 부인과 함께 가게를 차렸으나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그럴 때마다 빌려 쓴 카드 빚이 가정불화를 싹트게 했고 끝내 단란한 가정을 파경에 이르게 했다.
이혼 후 이씨가 떠안은 빚은 K카드 2,100만원, B카드 800만원 등 총 3,500만원. "신용불량자에 등록돼도 상관없다. 월급 한 푼 안 남기고 다 모아도 매달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이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나게만 해달라." 이씨의 눈물 어린 하소연이다.
서울 명동 센트럴빌딩 7층 신용회복지원위원회. 이곳 인터넷 사이트(www.pcrs.or.kr)에 개설된 '사이버민원실'에만 요즘 하루 평균 200∼300건의 개인워크아웃 관련 상담이 폭주하고 있다. 하지만 상담자의 대다수는 개인워크아웃의 대상이 아닌 단순 연체자. 30만원 이상, 혹은 3건 이상의 소액채무를 3개월 이상 연체해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사람에게만 개인워크아웃 신청자격이 주어지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겠다는 심정으로 위원회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특히 최근 들어 주요 금융기관들이 연체 경력자의 신용카드 한도를 대폭 축소하면서 '돌려막기'가 어려워지자 "차라리 신용불량자가 되겠다"는 '자포자기형' 민원도 급증하고 있다.
신용회복지원위원회 관계자는 "자격요건도 안되면서 무조건 개인워크아웃의 도움을 받게 해달라는 사람들이 주류"라며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얼마 안돼 이들 대부분이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것이란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방치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최근 들어 은행과 신용카드 업계가 동시다발적으로 '잠재 부실고객'의 카드한도 줄이기에 나서면서 서민들의 신용경색이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다. 특히 여러 장의 카드를 돌려가며 빚을 내서 빚을 갚아온 다중(多重) 채무자들은 일시에 돈줄이 막히면서 신용불량 상태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용불량자 수가 10월 한 달 사이에만 무려 7만3,800명이나 증가, 사상 최대치(252만8,945명)를 기록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금융감독당국은 신용불량자가 내년 하반기에 350만명까지 육박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경제활동인구 10명 중 2∼3명이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얘기다.
이처럼 신용불량자가 갑자기 불어나면 빚으로 인한 살인이나 강도, 자살 같은 범죄가 늘고 이혼가정이 급증하는 등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할 것으로 우려된다. 뿐만 아니라 부실자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이 흔들리고, 극심한 내수위축으로 우리 경제는 다시 장기불황의 악순환에 빠질 위험성이 높다. 이 때문에 금융 전문가들은 가계 빚의 '연착륙'을 위해선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고객의 돈줄을 막을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유예기간을 두고 순차적으로 한도를 줄여나가는 속도조절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崔公弼) 연구원은 "신용난민이 양산될 경우 사회 경제적 손실이 너무 큰 만큼 상당한 완충기간을 두고 서민들이 차근차근 빚을 줄여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사전예고제'형식으로 고객 개개인에게 6개월 내지 1년 전에 미리 한도축소 내용을 고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신용불량자를 구제하기 위한 개인워크아웃(신용회복지원협약) 제도가 도입됐지만 신용불량 상태에 빠지기 전 단계의 소비자를 구제할 제도적 장치가 전무하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신용회복지원위원회 한복환(韓福煥) 사무국장은 "최근의 신용불량사태는 채무자가 갚을 능력도 없이 과잉차입을 한 탓도 있지만 무분별하게 개인대출을 늘려온 금융권의 책임도 크다"며 "개별 금융기관들이 연체자의 신용한도를 무조건 축소해 신용불량자로 내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변형섭기자 hispe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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