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감상의 대상이자 탐구의 대상입니다. 법의학의 눈으로 보면 그림 속에서 사람의 삶과 죽음을 들여다보고 그의 인권도 살필 수 있지요." 학술원 회원이자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 고려대 명예교수인 문국진(文國鎭·77)씨가 낸 '명화와 의학의 만남'(예담 발행)은 원로 법의학자의 눈으로 본 그림 이야기이다. 그림과 의학이라는, 전혀 별개 분야의 접목을 시도하고 그림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저자가 특히 관심을 보인 화가와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와 그가 그린 의사의 초상화 두 점이다.
고흐는 프랑스 남부 아를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존경하던 고갱을 불러 공동 생활을 한다. 그런데 개성 강한 두 사람은 불화를 일으켰고 이를 참다 못해 고흐는 귀를 자른다. 이때 그를 치료한 의사가 레이박사다. 레이는 고흐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2주만에 퇴원시킨다. 고흐가 발작을 일으켜 다시 입원하자 이번에는 어머니 아파트에서 고흐가 그림을 그리도록 하려 했으나 병원의 반대로 관철시키지 못했다. 고흐는 환자를 배려하는 레이를 고맙게 생각해 초상화를 그려준다.
또 다른 초상화의 주인공 가셰박사는 고흐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치의였다. 정신병을 앓던 고흐는 동생과 가깝게 지내던 가셰를 찾아 파리 근교 오베르로 이사간다. 그런데 가셰는 치료는 등한시하고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요구했고 고흐는 마지 못해 그려준다.
"두 그림을 자세히 보세요. 조금 투박하기는 해도 레이 초상화에는 그의 높은 기상과 의지가 잘 표현돼 있습니다. 반면 가셰 초상화는 교활한 느낌을 줍니다. 그림에는 화가의 생각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흐와 두 편의 초상화를 보면서 저자는 그림에 빠져들게 됐다. 저자가 1990년 고려대 의대 교수를 정년퇴임하고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음악이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1840∼1893) 음악에 매료됐는데 어느날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궁금증이 생겼다. "차이코프스키의 사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가 콜레라에 걸렸는데도 면회가 허용됐고 죽은 뒤에는 손이나 이마에 입을 맞추도록 허용됐답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리 유명인이라 해도 전염병을 앓았는데 격리되지 않다니…"
그는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러시아는 동성애자를 처형하거나 시베리아 유형을 보냈는데 대법관, 검찰 부총장 등 권력 핵심에 있던 동창들이 그의 명예를 고려, 콜레라 전염으로 죽었다고 위장하기 위해 사약을 내린다. 저자는 사약을 비소로 추정한다. 비소를 먹으면 콜레라 증세인 쌀뜨물 같은 설사를 하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해서 음악에 재미를 붙인 그는 관심의 영역을 미술로 확대한다. 3년간 미술관 등에서 미술사, 미술평론 강좌를 들었다. 국내외 유명 미술관에서 낸 도록과 화가의 전기를 구해 읽었다. 그리고 고흐 이야기를 알았다.
저자는 이탈리아 화가 조토(1267∼1337)의 '십자가의 예수'와 야코포 벨리니(1400∼1470)의 '성모자상'을 보면서 예수와 마리아는 심장이 오른쪽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십자가의 예수'에서는 예수의 오른쪽 가슴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다. '성모자상'은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오른쪽으로 안고 있다. 아기는 엄마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면 편안해 하기 때문에 심장이 있는 방향으로 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은 대부분 왼쪽에 심장이 있는데 2,000명에 한명 정도는 오른쪽에 있습니다. 게다가 오른쪽 심장은 유전되기도 하지요. 예수, 마리아는 오른쪽 심장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림에는 화가의 진실성도 담겨있다. 통풍을 앓는 프랑스 국왕 루이14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의 초상이 그렇다. 프랑스 화가 이아생트 리고(1657∼1743)의 '루이14세의 초상'에는 루이 14세의 아픈 발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이탈리아의 16세기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카를5세 초상화는 통풍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통풍 환자는 발가락의 통증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신발도 큰 것을 싣는데 그림에 그런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리고는 권력에 아부했고 티치아노는 사실을 사실대로 그린 화가라는 게 저자가 내린 결론이다.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작품은 저자를 특히 안타깝게 만든다. '이삭줍기'에서 허리를 굽히고 이삭을 줍는 여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허리 통증이 심할까 걱정한다. '괭이를 든 사람'은 고된 노동에 지친 한 남자가 괭이를 의지하고 서 있는 모습이다. 그 자세가 너무나 위태로워 보이는데 저자는 의학적 측면에서 볼 때 그림 속 주인공이 척추 디스크를 앓고 있는 것 같다고 추정한다.
저자는 결국 작품의 진가를 알려면 지은이와 작품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예술작품은 감상자가 노력한 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사진=김재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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