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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VS 盧](4) 돈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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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VS 盧](4) 돈관리

입력
2002.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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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후보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가 선거 운동에 뛰어든 뒤 지갑에서 꺼낸 돈은 27일 부산에서 붕어빵 값으로 낸 1만원이 전부다. 붕어빵은 그가 가장 즐기는 군것질거리다. 직접 돈 쓸 일이 거의 없어 이 후보의 지갑에는 10만짜리 수표 2장, 1만원 짜리 지폐 7,8장만이 들어 있고 신용카드도 아예 없다. 대신 수행비서가 이 후보의 신용카드를 긁거나 당과 후원회에서 월 2,000만∼3,600만원 정도를 결제해 준다. 이 후보는 그러나 가족 모임 등에서 사적으로 돈을 써야 할 때는 수행비서에게 신용카드로 내게 하거나 부인 한인옥(韓仁玉)씨에게 미룬다.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습관은 법관 시절부터 몸에 뱄다.

법조인 시절은 물론 정치인이 된 뒤에도 이 후보로부터 사적으로 격려금이나 용돈을 받은 인사는 손꼽을 정도다. 1997년 대선 때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선거운동을 도왔던 한 특보는 선거가 끝난 뒤 이 후보가 "고생했다"며 처음으로 건네 준 50만원을 받고 감복해 한동안 쓰지 않고 보관해 두었을 정도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이따금씩 주위 사람들에게 수백만원 단위의 격려금과 활동비를 건넨다는 후문이다.

그의 돈 씀씀이는 매우 엄격하다. 최근 타계한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남긴 재산은 30년 이상 변호사를 했는데도 55년부터 살아온 종로구 명륜동의 1억9,800만원짜리 주택, 충남 예산의 선산 등 3억원을 넘지 않는다.

경기고·서울법대 후배로 이 후보와 절친한 서정우(徐廷友) 법률고문은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폐를 끼치고는 못사는 사람"이라며 "빡빡하다고 느낄 정도로 철저하다"고 말했다. 그는 "총재 시절 이 후보와 가끔 식사를 하고 밥값을 내려고 하면 번번이 계산이 이미 끝난 뒤였다"며 " '돈 잘 버는 후배가 밥도 한 끼 못사느냐'고 푸념하면 '정치인은 함부로 밥 얻어 먹는 게 아니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렇다고 이 후보가 인색하다는 평을 받는 것은 아니다. 법조인 시절에는 후배들과만나면 예외 없이 자신이 돈을 냈다. 부장판사 시절에는 변호사 등에게 도움을 받는 관행에서 벗어나 아버지로부터 조금씩 지원을 받았다. 아버지가 잊어 버렸을 때도 직접 말은 못하고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에게 "아버님은 잘 계시느냐"고 변죽을 울리는 식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정치자금에 관해서도 비슷하다. 10월 중앙당후원회를 앞두고 걱정이 된 김영일(金榮馹) 사무총장이 망설이다가 이 후보에게 "대선이라서 어쩔 수 없으니 주변에 전화라도 좀 해달라"고 요청했다. 순간 이 후보는 얼굴이 벌개지더니 몇 분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김 총장만 무안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후원회가 끝난 뒤에도 이 후보는 주요 후원자에게 답례 전화라도 하라는 김 총장의 건의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앞서 97년 대선 때는 투표를 며칠 앞두고 당시 김태호(金泰鎬) 총장이 "이 후보가 나서면 300억원은 모을 수 있다"며 모 재벌과의 만남을 주선했으나 그는 끝내 거절, "현실을 너무 모른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에 앞서 한 측근이 후원회에서 "이 후보가 승낙만 하면 감옥 갈 각오로 돈을 모으겠다"고 했다가 뒤늦게 이를 안 이 후보가 "그 사람 후원회 나오지 못하게 하라"며 이후 그를 멀리 했다. 이 후보가 24일 당직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선자금 사용 내역을 시민단체에 공개하기로 결정한 것도 정치자금에 관한 한 거리낌이 없다는 나름대로의 자신감 때문이다.

/이동국기자 east@hk.co.kr

■노무현 후보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는 개인적 재산관리에서 가족의 생활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부산에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 변호사 활동을 제대로 못하게 되자 1979년께 친지가 운영하던 카센터에 자금을 투자했다. 1996년에는 생수회사의 빚 보증을 섰다가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엉겁결에 회사 경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친형에게 땅 구입자금을 빌려 주었다가 형 명의로 땅 투기를 하지 않았느냐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이재 활동에서 노 후보는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한 측근은 "노 후보는 기분이 나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과다한 투자를 했다"며 "대개는 인정에 쏠린 예가 많았다"고 말했다.

1996년에 이사해 살고 있는 현재의 명륜동 집이 부인 권양숙(權良淑)씨 명의로 돼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재산관리 능력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그는 1990년 장기욱(張基旭) 전 의원을 위해 여의도의 아파트를 담보로 2억원의 빚 보증을 섰다가 낭패를 보았고 부산 지역의 한 지구당 위원장의 보증을 섰다가 결국 이 아파트를 팔아야 했다.

노 후보는 체질적으로 낭비를 싫어한다. 후보가 된 뒤에도 측근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사 주변에서 밥값이 싼 집을 찾는 것이었다. 대신 변호사로서 많지는 않더라도 고정적 수입이 있기 때문에 정치자금과 개인자금을 최대한 구분해서 써 왔다. 대통령후보가 되기 이전 그가 "오늘은 내가 사겠다"고 말하는 날이면 으레 자신의 신용카드로 계산을 했다. 그러나 대통령후보가 된 이후에는 자신이 직접 계산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그래도 그의 지갑에는 신용카드 2장과 10만원짜리 수표 10장, 꼬깃꼬깃하게 접은 100만원 짜리 수표 1장이 비상금으로 들어 있다.

정치인으로서 노 후보는 돈 문제에 대해서는 늘 자신이 없었다. 몇 해 전 딸 정연(靜姸)씨가 해외 어학 연수를 가게 해 달라고 조르던 때의 일이다. 며칠 고심 끝에 노 후보는 "정치인으로서 자금을 만들 줄 모르는 내가 쓸 수 있는 돈이 뻔하지 않느냐"며 "그나마 지인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돈으로 딸 어학연수를 보낸다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니"라고 대학생 딸을 타일렀다. 결국 정연씨는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어학연수 비용을 마련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그는 "돈을 구해 쓸 자신이 없어 정치를 그만둬야 겠다"고 선언해 측근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주위의 만류로 정계은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돈과 거리가 먼 그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화이다. 한동안 자금 동원 능력의 부족을 이유로 정치를 포기할 생각까지 할 정도로 자신의 심각한 약점으로 여겼던 노 후보가 언제부턴가 "돈에 신경을 써서는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후 그는 돈 만드는 일과 더욱 멀어지게 된다.

결국 노 후보 진영에서 필요한 돈은 자연히 측근, 보좌관들이 만들어야 한다. 지난 봄 당내 후보 경선 당시 측근들은 후보 등록 전날 밤까지 기탁금 2억5,000만원을 구하지 못해 사방으로 뛰어 다녔다. 경선 과정에서도 측근들의 신용카드가 총동원됐고 한도 초과로 거래가 중지된 신용카드가 속출했다. 정치자금에 대해 무책임할 정도로 외면해 버렸기 때문에 그는 대통령후보가 된 뒤 '후보가 당에 돈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당내 불만을 사야 했고 '깨끗하다'는 평보다 '능력이 없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고주희기자orwe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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