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54)라는 이름은 우리 독자에게 낯설지 않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로 일찌감치 알려진 데다, 2002년 공쿠르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이 더해져 그의 작품에 대한 독서욕이 적지 않게 일던 참이었다.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로마의 테라스'(문학과지성사 발행)가 출간됐다. "훌륭하고 또 훌륭한 이야기"라는 심사위원들의 찬사를 들으면서 2000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작가는 엠마누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 등 유명한 철학자들과 함께 철학 공부를 했고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고대 프랑스어를 강의했다. 지적인 프랑스인답게 그의 작품은 가슴보다는 머리에 호소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2001년 번역출간된 키냐르의 다른 작품 '은밀한 생'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테라스' 역시 전통적인 소설의 모양을 따르지 않는다. 증언, 서간, 콩트, 묘사, 대화, 아포리즘 등 갖가지 글의 형식이 섞여 있다. 실제로 키냐르가 매번 발표하는 작품마다 소설, 시 혹은 에세이로 분류해야 하는지를 놓고 논란이 일곤 했다. 표지에 '소설'이라고 씌어진 이 작품의 내용은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화가의 사랑 이야기다. 첫번째 장에서 주인공 몸므가 털어놓는 얘기가 이 책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나는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얼굴에 온통 화상을 입고 말았지. 그 후 해안 절벽에 숨어 살았네."
약혼자가 있는 여자와 사랑을 나눈 죄였다. 분노에 찬 약혼자가 정사를 나누는 연인에게 들이닥쳤다. 남자의 얼굴에 질산을 부었다. 며칠 뒤 여자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나의 문은 이제 당신에게 영원히 닫혀버렸어요. 앞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예요." 이제 이 슬픈 사랑 이야기는 조각난다. 부서진 47개의 장(章)은 저마다의 형식을 갖고 목소리를 낸다. 그것은 판화가인 주인공의 예술 작업과도 닮았다. 사랑의 유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꿈, 아름다운 동판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학자 생 시랑의 잠언, 두번째 여자를 두고도 마지막까지 첫사랑의 이름을 부른 판화가의 죽음…. 그 속에서 판화가는 계속해서 소묘하고 동판에 새기고 판화를 찍는다. 그는 고통스런 절망을 새기고 사랑의 기억을 새긴다. 사랑은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로 이루어진다. 판화가가 이미지를 판각하면 이미지는 머리 속에서 빠져나온다. 소설가가 이미지의 조각들을 문장으로 펼쳐 놓으면 독자는 퍼즐을 맞추듯 이미지의 자리를 찾는다. 키냐르는 판화가가 그러하듯 동판들 위에 짤막한 문장들을 새겨서 소설을 만든다.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로마의 테라스'를 두고 "설명할 수 없는 소설"이라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그 점이 이 소설을 그처럼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고 평한다. 이 작품을 명료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토록 모호한 언어의 구조물이 놀랍도록 매혹적이라는 것이다. 소설에서 몸므가 말한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법이지.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책을 읽는 사람들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과 사랑과 독서는 숨죽이면서 구석진 공간에서 서성이는 행위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도 절망과 사랑의 감정을 아프고 황홀하게 경험한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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