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4월2일 강원 화천 산악의 최전방 부대. 이곳 폐유류고 뒷편에서 허원근(許元根) 일병이 가슴과 머리에 모두 3발의 총상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이 죽음에 대해 올해 8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8년 만에 밝혀진 진실"이라며 타살 결론을 내렸으나 국방부는 84년 두 차례, 99년 한 차례 조사에 이어 28일 발표한 특조단 재조사 결과에서도 4번째 자살 결론을 내놓았다. 과연 어느 편이 진실인가.
사건 개요
의문사위는 84년 4월1일 저녁 소대장 진급축하 회식후 2일 새벽 내무반에서 술취한 노모 중사가 난동을 부리는 과정에서 오발된 총탄에 허 일병이 맞았고, 이를 자살로 은폐하기 위해 오전 10∼11시에 폐유류고 뒤로 허일병을 옮겨 누군가 2발을 더 쏘았다고 결론내렸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오전 10∼11시에 허 일병이 군복무 부적응으로 폐유류고 뒤에서 자신의 M16 소총으로 좌·우 가슴 및 머리에 총 3발을 발사해 자살했다고 단정 지었다.
새벽 총성의 진실은
의문사위가 허 일병이 노모 중사의 총에 맞았다고 추정한 시간은 새벽 2∼4시. 그러나 28일 국방부는 "당시 기록 분석결과 오전 10∼11시 3발의 총성이 청취됐으며 새벽에 총성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당시 기록이란 의문사위가 '가혹조사로 진실을 은폐했다'고 지목한 헌병대 등의 조사 기록이다.
이에 반해 의문사위는 사건 당일 초소근무를 섰던 간접목격자가 오전 2발 정도의 총성을 들었던 점, 새벽 2∼4시경에 인근 사단에서 확인되지 않은 1발의 총성을 들었다는 상황보고 등에 주목했다.
총상부위의 색깔이 서로 다른 이유는
의문사위는 좌우 가슴의 총상부위 피부색깔이 다른 것은 7∼8시간의 시간차를 나타내는 증거라고 주장한 반면, 국방부는 총상 피부와 의복, 총구와의 밀착 정도가 서로 다른 때문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또 국방부는 허 일병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모두 한 방향으로 흐른 점은 시신이 옮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의문사위는 허 일병 시신상태에 대한 법의학적 해석이 자·타살을 확정할 수 없는 것으로 나온만큼 이 부분은 큰 의미가 없다고 맞받았다.
전우(戰友)들의 다른 진술
사건의 실체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무엇보다 관련자들이 두 기관에서 각기 다른 진술을 하고있기 때문. 국방부는 당일 아침까지 살아있는 허 일병이 목격됐고, "아침에 사건 은폐를 위해 대대장이 도착했다"고 의문사위에서 말했던 대대장 운전병도 진술을 번복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중대 상황병과 운전병 등은 의문사위의 현장조사 때 기자들에게 의문사위에서의 진술 내용을 직접 확인하기까지 했다. 또 국방부가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고 밝힌 전모 상병도 전화 통화에서 "국방부의 태도가 불쾌해 응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오전에 총성 두어 발을 듣고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피다 몇 명이 폐유류고 근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던 초소병은 "국방부 조사의 분위기가 위압적이어서 다시 이등병이 된 것 같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여전히 갈길 먼 진상규명
의문사위는 8월 조사 결과 발표 때 관련자들의 진술 외에 타살을 입증할 증거 확보에 실패, 공격의 여지를 남겼고, 이번에 국방부 역시 타살의혹을 확실히 뒤집을 만한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한국외대 이장희(李長熙·법학) 교수는 "국방부, 의문사위, NGO 대표들로 중립적 기구를 구성, 혼란스럽지 않은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정상원기자 ornot@hk.co.kr
● 특조단 조사 의문점
국방부 특조단은 3개월간 '허 일병 사건'에 대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했다고 자평 했지만 세부적인 의문점들은 여전하다.
▶탄피 개수
총상은 세 곳인데 헌병대의 최초 조사 때 시체주위에서 발견된 탄피는 2개. 특조단은 헌병대의 단순 실수였다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탄피회수는 총기사고의 가장 중요한 단서다.
▶사망동기
허 일병은 휴가 이틀 전날에 사망했다. 특조단은 "일반인들이 인정하기 힘든 사소한 문제도 자살자에게는 심각한 자살동기가 될 수 있다"고 의미를 축소했다.
▶법의학 공방
의문사위는 총을 맞으면 행동력이 극히 제한되기 때문에 제2, 제3탄을 스스로 발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특조단은 "유사사례가 있다"면서 "당일 기온인 영하 5도에서 허 일병이 처음 총을 맞고 7시간 정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역공세를 폈다.
▶피 묻은 탄띠
탄띠에 피가 맺히려면 상당 시간이 경과해야 하나 국방부는 이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1시간 내 3발을 쏘았다면 피가 맺히지 않는다는 게 의문사위의 반박. 자살하면서 스스로 탄띠를 풀었다는 특조단의 주장도 설득력이 약하다.
▶물청소 흔적
특조단은 내무반에 피가 흘렀고 이를 없애기 위해 물 청소를 했다는 주장은 '완전날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문사위는 이날 '물 냄새가 확 날 정도로 물 청소 흔적이 있었다'는 내용의 당시 사단 헌병계장의 진술서를 공개했다.
▶선택적 증언 채택
의문사위는 특조단이 허일병의 사망 위치에 대한 중대원들의 엇갈린 진술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노중사의 총격을 증언한 전모 상병에 대해 직접조사를 하지 못한 점도 특조단 조사의 치명적 약점이다.
/김정호기자 azure@hk.co.kr
● 시민단체·유족 반응
국방부 특조단이 28일 '허원근 일병 사건은 자살'이라고 발표하자 시민사회단체와 유족들은 "국방부의 조사결과야말로 완벽한 날조"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또한 "국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투명하고 공개된 절차에 따라 민·관·군이 함께 하는 재수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화운동정신계승 국민연대 이은경(李銀敬) 사무처장은 "국방부는 성역 없는 수사를 통해 국민에게 진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던 것"이라며 "군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크게 무너져내릴 것"이라고 통탄했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의 김학철(金學喆) 진상규명위원장은 "특조단이야말로 당시 부대원들에게 '형사책임을 지겠느냐'고 묻는 등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조사를 벌였다"며 "정해진 각본에 따라 자살을 입증해 내기 위한 조사에 불과했다"고 비판했다.
천주교 인권위원회 김덕진(金德珍) 간사는 "국방부, 의문사위, 시민사회 단체 등으로 구성되는 중립적인 기구를 통해 투명하고 납득할 만한 조사에 착수하지 않는다면 국방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영원히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허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許永春·63)씨도 "우리 국민 누구도 국방부 조사단의 조사결과를 믿지 않을 것"이라며 "결과 발표를 한 국방부 관계자나 군의 강압에 휘둘려 자살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던 법의학자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인권운동 사랑방 등 26개 시민사회단체는 29일 오전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허일병 사건에 대한 국방부의 무책임한 태도를 규탄하고 재조사를 촉구할 예정이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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