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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모나미 인생 송삼석 (12) 덥석 장관 손을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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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모나미 인생 송삼석 (12) 덥석 장관 손을 잡다

입력
2002.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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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실 소파에 앉아있는 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장관실을 들락거렸다. 주로 결재를 받으려는 공무원들이거나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그들과 허름한 대학생 교복을 입은 나를 비교하자니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느낌에 사로잡힐 만한 여유가 내겐 없었다.점심 시간이 되자 비서실 직원들이 문을 잠가야 한다며 나가줄 것을 요구했다. 거의 쫓겨나다시피 한 나는 할 수 없이 청사 앞 식당에서 국수를 한 그릇 사먹은 뒤 점심시간이 끝나길 기다려 다시 장관 비서실에 들어가 앉았다. 그땐 전쟁중이라 그랬는지 일반 시민이 청사에 출입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비서실 직원들도 나 같은 민원인들이 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는 걸 알았는지 야박하게 굴지도 않았다. 제 풀에 지쳐 나가길 기다리며 오히려 내 눈치를 보기도 했다.

앉아있는 건 쉬운 일인데 생리작용은 참기 힘들었다. 두어 시간 가량 지나자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비서실을 나와 복도 끝 화장실에 들어가 볼 일을 보고 복도를 걸어오는데 비서실 옆문이 열리더니 콧수염을 기른 신사 한 분이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무심코 지나치던 내 머리속에 번개처럼 "혹시…"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화장실 문앞에 버티고 서서 그 신사가 나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그 신사가 화장실을 나오는 순간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장관님." 예기치 못한 일에 화들짝 놀란 그는 말까지 더듬으며 "자, 자네 누군가"라고 소리쳤다. 이교선(李敎善) 상공부장관이었다.

사실 배짱 좋게 온 종일 비서실에 앉아 장관을 만나겠다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장관은 전주신흥학교 교사 시절 큰 형님(宋正錫)을 가르친 은사였다. 나중에 이 장관은 큰 형님이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떠날 때 재정보증까지 서주셨다. 올해 84세인 큰 형님은 지금도 건강하게 일본 큐슈(九州) 미야노조(宮뀃城) 병원에서 내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장관님. 저 정석이 형님의 동생 송삼석이라고 합니다. 인사 드리겠습니다." 내 소개를 하고 넙죽 절을 하자 이 장관은 "아 자네가 송기주(宋基周) 장로 막내아들인가"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 장관은 내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장관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장관실에 앉아 전쟁이 나던 해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형님들의 근황에 대해 말씀드리고 나자 이 장관은 "그래, 자네가 여기 온 까닭이 뭔가"라며 내가 원하던 본론으로 들어갔다. 막무가내로 장관실로 찾아오기까지의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이 장관은 박장대소했다. 웃음을 그친 이 장관이 "취업에 필요한 서류는 갖고 왔느냐"고 묻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언제나 교복 안주머니에 품고 다니던 호적등본, 졸업증명서, 성적증명서 등을 꺼내 드렸다.

이 장관은 비서를 호출했다. 장관실로 들어온 비서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조금 전까지 비서실에 앉아 장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쓰던 젊은 녀석이 어느새 장관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이 장관이 눈치를 챈 듯 비서에게 나를 소개한 뒤 고시위원회에 서류를 접수시키고 적당한 자리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고시위원회는 당시 공무원 채용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내가 공무원이 되는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서류를 갖고 나가던 비서가 뭔가 문제가 있는 듯 발걸음을 돌리며 "그런데 장관님…"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일이 잘못된 것일까…. 내 얼굴에서 싹 웃음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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