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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58)페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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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58)페르미

입력
2002.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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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1월28일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53세로 작고했다. 페르미는 흔히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정부의 맨해튼 계획(원자폭탄 제조계획)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물리학자들은 페르미 외에도 많았고 그 계획이 여러 선행 연구에 바탕을 두고 수립됐으므로, 페르미를 원자폭탄의 '발명자'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페르미가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가장 중요한 물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만약에 페르미가 조국 이탈리아의 파시즘 체제를 힘들어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193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을 계기로 미국으로 망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원자폭탄의 등장은 다소 늦춰지거나 유럽에서 먼저 이뤄졌을지도 모른다.페르미에게 노벨물리학상을 안긴 업적은 인공방사능 연구였다. 1930년대 초에 인공방사능을 처음 만든 사람은 졸리오-퀴리(마리 퀴리 부부의 사위)였지만, 그 뒤 중성자 충격을 통해 50종에 가까운 인공방사능을 만들어보인 사람은 페르미다. 인공방사능이 처음 발견될 무렵 페르미는 그 이론적 바탕이 될 베타붕괴(불안정한 원자핵이 전자나 양전자를 방출하고 다른 핵종으로 변환하는 현상) 이론을 내놓은 상태였다. 그는 또 미국으로 망명한 뒤인 1942년 시카고 대학 야금연구소에서 자신이 설계한 원자로 CP-1을 통해 우라늄 핵분열 연쇄 반응 실험에 성공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통제된 핵에너지 방출을 뜻했다. 미국 정부와 군부가 페르미에게 눈길을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페르미는 로마 출신이다. 1926년부터 미국에 망명하기 전까지 로마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가르쳤다. 기억력이 뛰어나 나이가 든 뒤에도 단테의 '신곡'을 줄줄 외웠다고 한다.

고 종 석/편집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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