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을 보면 한동안 혼란스럽다. 휴가 나온 강 상병(장동건)이 들어간 술집 출입문 유리창에 조악하게 쓴 '반공' '방첩'이란 글씨나 도저히 병원이라고 할 수 없는 초라한 벽돌집의 '정신병원'이란 간판을 보면 70년대 같다. 부대 풍경을 보면 아무리 늦춰 잡아도 80년대다. 그러다 공중전화 부스와 '서산 갯벌을 살려주세요'란 현수막을 보면 요즘이다. 이 같은 혼란은 강 상병이 의병제대 신고식을 하면서 "2002년 6월15일"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서야 풀린다.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배경이나 소품의 성의 부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나쁜 남자' 마지막 부분에서 여자가 매춘을 하는 트럭 역시 비슷한 지적을 받았다. 김 감독은 "저 예산영화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타 장동건이 주연을 맡은 '해안선'도 9억원 짜리 영화. 제작비에 맞춰야 하고, 그러자면 빨리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들의 빡빡한 스케줄 탓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감독의 태도에 있다. "지나치게 디테일을 강조하다 보면 다른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 건성건성 넘어갈 것이 있고, 집중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군부대는 아직도 제약이 많은 한계도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강 상병만 다른 병사들과 다른 셔츠를 입은 것까지 핑계를 댈 수는 없다. 정신병원 장면도 무작정 제작비와 촬영시간을 아끼려고 인근 도시로 나가 촬영하는 것을 감독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후문.
김기덕 영화의 이런 단점은 사실 해외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김 감독도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는 괜찮은데 국내에서는 왜 그러는지"라며 언짢아 했다. 외국영화인들의 '너그러움'은 당연하다. 그들은 한국의 지금과 과거 생활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 독특한 자기 색깔로 주목 받고 있는 김기덕 감독에게 디테일 부족까지 칭찬받아야 할 고집은 아닐 것이다. 또 저예산 영화라고 그래도 된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개봉 3주만에 170만명을 동원한 '몽정기' 도 비슷하다. 1988년이 배경인 영화는 주간지, 도색잡지, 신문 등 나름대로 시대에 신경을 썼지만 곳곳에 허점 투성이다. 개인택시 버스정류장 운동화 컵라면 책가방 등이 모두 요즘 것이다. 이중에는 정말 구하기 힘든 것도 있다. 제작사(강제규필름)측은 "많은 비용을 들여 구하거나, 새로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제작비(18억원)와 제작일정(한달 반 촬영)이 늘어나게 된다. 시대극의 한계"라고 말했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오락영화에서 손님을 끄는 데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감독(정초신)의 태도.
이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피아노를 치는 대통령'에서 청와대 영빈관도 실제와 다르다. 청와대 측이 촬영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루브르 박물관을, 미국이 백악관을 내주는 것과는 대조적인 한국 사회의 태도도 영화의 리얼리티를 떨어뜨리는 원인중의 하나.
종로거리 세트와 소품 의상 등에 8억원을 투입, 완벽한 시대 재현으로 호평을 받은 'YMCA 야구단'의 제작사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아무리 상업영화라 하더라도 철저한 시대 표현은 기본이다. 영화를 보는 재미나 흥행성적과 상관이 없더라도 국사교과서가 틀리면 안되듯 영화도 정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최근의 관객의 태도와 흥행결과를 보면 이런 생각에 회의가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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