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번째 작품이다. 거지에서 왕까지 안 해본 직업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너무 부담스러웠어요. 담배 한대 마음대로 피울 수 없었어요. '고래사냥'이나 '투캅스'에서는 마음껏 놀아도 용납이 되잖아요. 그런데 대통령이 되니까 유치해도 안되고, 그렇다고 굳어 있자니 영화 맛이 안 나고. 줄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자기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리구나. 어딜 가고 싶어도, 누굴 만나고 싶어도 국민 눈치 봐야 하고. 점점 외로워지는 자리구나. 또 희생적이어야 하는구나. 거짓말하지 않고, 국민과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 한민욱대통령도 그렇잖아요. 피아노를 못 치면서 국민을 속인 것, 딸의 담임 교사에 대한 사랑을 솔직히 고백하니까 모두 더 좋아하잖아요."
피아노 얘기가 나왔으니 진짜 실력이 궁금했다. 직접 영화 '모정'의 주제가인 'Love is a many splendid thing'을 멋들어지게 쳤으니까. "건반 한번 눌러본 적 없어요.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가장 부담되는 설정이었죠. 고민 고민하다 '방법이 없다. 대역도 흉내도 안 된다. 배우자'고 결정했죠. 노래 한 곡에 꼬박 세 달이 걸렸어요."
성실맨 안성기(50)씨 답다. 피아노 뿐이랴. 촬영중인 뮤지컬 영화 '미스터레이디'(감독 조명남)에서는 노래까지 부른다. "한 곡 부르고 나면 도저히 한 곡 더 부를 힘이 없어요. 노래는 목소리가 아닌 온 몸으로 부른다는 사실도 알았어요. 새로운 경험이자 모험입니다. 굳이 피할 이유가 없죠. 한국영화의 장르와 소재를 넓혀야 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그러면서 임권택 감독을 언급했다. 그 나이에도 식지 않은 창작욕. "나이 들면서 나 역시 그 에너지가 생긴 것 같아요. 대사의 맛도 더 잘 살려낼 수 있을 것 같고. 20년 전 배창호 감독이 '대사에 힘만 조금 더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한 말이 생각나요. 배우로서 나이 먹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지난 작품들을 다시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몰라요. 배우에게 '이 정도면 됐어'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적은 없어요. 늘 '더 잘할 수 있었는데"라고 아쉬워하면서 '다음에는' 하는 욕구가 솟아나야 해요."
그렇게 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3년 전 어느 날부터인가 "비슷비슷한 안성기"란 말이 나오고, 주연이 아닌 서너 번째 인물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그는 "아니야"라고하지 않았다. 그래, 비중에 상관없이 작품성과 내가 맡을 인물의 매력을 보자. "그순간 마음이 푸근해지고, 연기도 더 좋아졌어요. 작은 역조차 제대로 표현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책임감도 더 강해졌고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무사'가 그랬다. 그때부터 확실히 달라졌다. 늘 보던 안성기가 아니라 늘 조금씩 다른 안성기로 나타났다. 작품을 위해, 감독을 위해 작은 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진실게임' 이나 '구멍'처럼 꼭 만들어졌으면 하는 저예산영화에도 기꺼이 출연했다. 그래서 장동건이 '해안선'을 선택한 것이 너무 흐뭇하다. 지금도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돈만 생각하면 결국 상업영화 밖에 못한다. 그건 소모에 불과하다. 할리우드에서도 그러지는 않는다. 스타는 때론 자신을 있게 해주는 영화에 봉사도 해야 한다." '국민배우'란 호칭은 연기 하나로 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 피아노 치는 대통령
꼭 성찬일 필요는 없다. 찌개 하나라도 맛있게 끓어놓는다면 기분 좋은 식탁이 될 수 있다. '피아노 치는 대통령'은 그 찌개 같은 영화다. 할리우드 영화 '대통령의 연인'과 달리 대통령이란 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바쁘고 힘들며 정치적으로 권모술수를 부려야 하는지, 주변에 어떤 인물이 있고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관심이 없다.
다만 대통령이라는 인물 자체가 갖고있는 권위와 고정관념을 부수고 홀아비로서,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 '꼴통'인 여고생을 둔 아버지로서 한민욱 대통령(안성기)은 딸 대신 한시 '황조가'를 100번 쓰는 숙제를 하고, 딸의 담임교사 최은수(최지우)와 만나면서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결국은 정치적 계산보다는 남자로서 사랑을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프닝이 때론 유치하고, 황당하지만 유쾌하다. 게다가 이따금 세태까지 살짝 꼬집는 재치있는 풍자. 대통령도 몰라보고 마구 때렸던 노숙자에서 대통령 이름을 쓰는 웨이터가 된 김범수, 해병대 출신이라고 거짓말하는 늙은 술집 주인이 된 김인문 등 조연들의 만만찮은 웃음보따리. 상투적인 인물설정(대통령의 딸, 최은수)과 엉성한 구성(스승과 제자의 교감 방식)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
곽재용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한 늦깎이 신인 전만배(38)의 데뷔작. 이미 7년 전에 이 시나리오를 쓰고 데뷔하려 했으나 사전검열이 있던 시대에 대통령을 소재로 한 코미디가 어디 가능이나 한 일인가. 12월 6일 개봉. 전체관람가.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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