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4시 경기 성남시 복정동 사거리. 어둠이 사위를 둘러싼 거리에 낡은 가방을 둘러 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새벽 추위에 잔뜩 움츠린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주워 온, 밤 서리 맞은 나무판자와 종이로 공터에 불을 지폈다. "일찍 나왔네. 오늘도 엄청 춥구만." "어제 일은 안 됐어(힘들었어)." 화톳불 주위에 간단한 아침인사가 오가고, 인부를 구하는 승합차와 트럭 전조등이 어둠을 쫓기 시작하면서 수도권 최대 인력시장의 이른 하루가 시작됐다.■새벽을 여는 고단한 인력시장
"일은 무슨…, 나흘째 공치고 있는데…." 송모(55)씨는 대뜸 고함이다. "올 초 반짝 경기가 있더니 그것도 오래 못 가드만. 한 달에 엿새 일하면 많이 하는 거여." 사람들 틈에 끼여 불을 쬐던 송씨는 "다음 달에 제대하는 막내 학비가 벌써 걱정"이라며 "추위가 더 밀려오기 전에 마무리 공사라도 한건 잡아야 하는디"라고 허연 입김을 쏟아냈다.
허리 펴기도 힘들어 보이는 할머니들은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리면 발걸음이 바쁘다. "사람 구하러 온 거면 3개(3만원)만 주고 데려가." "방이 꽁꽁 얼어붙었어. 기름값이라도 벌게 나 좀 써줘." 할머니들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운 좋게 승합차에 올라 근처 비닐하우스로 떠나는 한 할머니는 "시금치 뽑으러 간다네. 바깥 일이 아니라 다행이여"라며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3만원이 어디냐"며 트럭에 매달리는 할머니들의 필사적인 몸부림과 "일당 6만원이 말이 돼, 완전 도둑놈 심보네"라고 욕지기를 퍼부으며 흩어지는 중년네들의 넋두리가 복정동 거리를 메웠다.
IMF 직후 1,000여명이 하루 일자리를 구했던 복정동 인력시장엔 여전히 200여명이 매일 '출근'하고 있다. 40∼50대 남성과 60∼70대 할머니가 대부분이고 젊은 사람들은 거의 없다. 올 초 건설 경기가 풀리면서 일거리가 좀 생기나 싶더니 최근에는 꽁꽁 얼어붙었다고 했다. 거기다 값싼 대체 노동력인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들을 대신하고 있다.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은 정치 이야기로 옮아갔다. "무슨 게이트다, 무슨 풍(風)이다 떠들던 가을부터 단가도 내려가고 일자리도 줄어 하루 60명 나가면 다행이지." "정치가 썩어서 그래요. 중산층을 위한다더니 우리 같은 밑바닥 인생은 다 죽으라는 거 아닙니까."
경기 안산시 안산역 뒤편 인력시장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반월공단 입구 유통상가 로비와 복도마다 들어찬 200여명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정치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했다.
■외국인에 밀려 설 땅도 줄어
한 차례 구인차량 행렬이 훑고 지나간 복정동시장. 남은 사람들이 다시 화톳불 주위로 몰려들었다. 손모씨가 "우리 일자리 뺏어가는 건 다 외국인 노동자"라고 운을 떼자 "맞아, 현장에 나가면 6할은 조선족이야. 그 사람들이 고분고분 5만∼6만원 받고 일하니 8만원이나 주고 누가 우릴 쓰겠어"라며 여기 저기서 맞장구다. 그러자 한 쪽에서 "3D 업종 누가 하려고 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으니까 공장이 굴러가지. 당장 그 사람들 나가봐, 일은 누가 해. 진짜 나쁜 놈들은 외국인 노동자 핑계 대고 일당 낮추는 업주들이지."
안산에서 만난 20년 경력의 용접공 장모(45)씨는 갈수록 인력시장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500명 가까이 모이더니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 안산에만 100군데가 넘는 용역업체에서 일을 긁어가니 배길 장사가 있나." 업주들도 값싼 외국인 노동자만 찾는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야 인건비 줄어 좋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거리 놓치면 숟가락 놔야하는 신세"라며 "이러다 언제 인력시장이 사라질지 모를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장씨의 말처럼 한국인이 모이는 상가 안 인력시장보다 외국인 노동자가 서성거리는 상가 바깥 인력시장이 어느 새 더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방수 보조일손을 구하러 왔다는 한 중년남자는 "한국인을 쓰고 싶어도 값을 높게 부르는데다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일당 7만원으로 사람을 구할 수 없자 "힘든 거 좋아요"라고 외치는 한족에게 6만원을 주기로 하고 함께 자리를 떴다. 오전9시가 넘도록 일자리를 구한 사람은 주로 조선족과 한족 등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고, 하루를 공친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근처 경품오락실로 발길을 돌렸다.
■장은 파했지만 장을 못뜨고…
성남시 복정동 인력시장이 파할 무렵 일자리를 얻지 못한 50여명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아직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 "마누라 눈치 보이고 하루종일 방 구석에 쳐 박혀 있으면 원체 답답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 "여기 모인 사람들 중 절반은 이혼한 홀아비"라는 누군가의 귀띔처럼 가족도 없는 사람들은 일을 얻지 못하면 귀신처럼 복정동 일대를 떠도는 것이 하루 일과다.
아직 불씨가 남은 공터에서 한 패가 쪼그려 앉아 화투를 꺼냈다. 근처 편의점에서 소시지나 삶은 계란으로 늦은 아침을 때우던 이들은 이내 술병을 땄다. 안주도 없이 술이 몇 잔 돌면 세상 이야기는 훨씬 질펀하고 과격해진다. "물가는 오르는데 일당은 자꾸 내려가니 이게 무슨 조화여." "똥값 받고 일할 바에야 크게 한탕 하고 도망치는 게 낫지." "일한 만큼 값을 쳐주면 우리 같은 무지랭이가 무슨 불만이 있겠어." 한탄은 끝없이 이어졌다.
/성남 안산=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사진 왕태석기자
■노동자들 "든든한 아침" 챙겨주던 복정동 무료급식소 이달말 폐쇄
22일 오전6시 경기 성남시 복정동 인력시장에 위치한 44평 '사랑의 무료급식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허리를 잔뜩 구부린 할머니, 짝을 이룬 중년의 노동자들이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낡은 건물의 구수한 된장국 냄새를 따라 계단을 오른다. 급식소 안엔 벌써 10여 명이 길다랗게 줄을 섰다.
자원 봉사자들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건넨 사람들은 살을 에는 추위와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맛있는 아침 식사에 열중한다. 하지만 밥알 한 톨, 국물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후딱 해치우고 차디찬 새벽 공기로 나서는 사람들은 이 달 말이면 급식소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8월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용직 노동자에게 따뜻한 아침밥을 제공해왔던 복정동 사랑의 무료급식소가 30일 문을 닫는다. 옛 복정동사무소였던 급식소 자리에 동사무소가 새로 들어서는 것. 성남시와 급식소 운영 주체인 성남시 기독교연합회가 다른 장소를 물색 중이지만 땅 주인들이 거절해 애를 먹고 있다.
/성남=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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