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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모나미 인생 송삼석 (10) 박정희 대통령과 볼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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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모나미 인생 송삼석 (10) 박정희 대통령과 볼펜

입력
2002.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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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보면 나와 모나미153 볼펜이 운명적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준 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이 국민적 지지와 관심을 끌기 위해 경복궁에서 5·16 군사쿠데타 1주년 기념 국제 산업박람회를 개최하지 않았던들 나와 볼펜은 결코 '40년 지기(知己)'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기술로 만든 볼펜은 다른 사람에 의해, 시기적으로도 한참 뒤에 생산됐을지도 모른다.박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기 6개월전인 1979년 4월. 청와대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4월30일 청와대에서 세계 각국의 문구류를 비교·전시하는 행사를 여니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당일 오후 3시가 좀 못돼 청와대내 대접견실에 들어가니 박찬현(朴瓚鉉) 문교부장관, 최각규(崔珏圭) 상공부장관, 안영철(安永哲) 공업진흥청장 등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업계에서는 이관수(李寬洙) 문구공업협동조합 이사장과 나를 포함, 6개 문구업체 대표가 참석했다.

행사에 앞서 당시 서석준(徐錫俊) 경제1수석비서관이 업체 대표들에게 주의 사항을 말했다. 박 대통령과 악수할 때 꽉 잡지 말라는 것, 질문을 하면 간단하게 답하라는 것 등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청와대측은 행사를 위해 미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 주재 공관에 연락, 외국의 유명 문구 제품을 공수해왔다. 나는 박 대통령에게 필기구의 특징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잠시 뒤 박 대통령이 행사장에 나타났다. 참석자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던 박 대통령이 내 앞에 서자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낮 술을 한 것이다. 악수를 하고 돌아서면서 박 대통령이 육영수(陸英脩) 여사 서거 이후 무척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산업화, 공업화 문제 못지 않게 교육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참석한 장·차관급 인사들과 업체 대표들에게 "이제 막 지각이 발달하기 시작한 어린이들이 자신이 쓰는 연필이나 볼펜, 노트 등 국산 문구류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게 되면 성인이 됐을 때 국산보다 외국산을 더 많이 찾게 된다"며 국산 제품의 품질 향상을 독려한 뒤 금융 지원책 마련을 지시했다. 그는 또 철저한 민족주의자답게 'GRAND PRIX'라고 표기된 연필통을 들어보이며 "영어를 전혀 쓰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영어가 주가 되고 우리 말을 적게 쓰면 민족주체사상이 없는 것 아니냐"면서 내게 "모나미도 우리 말로 상표를 크게 쓰고 영어는 작게 쓰는 게 좋겠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필기구류 코너에서 모나미153 볼펜을 집어 들곤 다시 내게 물었다. "송 사장님. 다른 나라 볼펜은 시원시원하게 잘 써지던데, 모나미 볼펜은 어째 좀 빡빡한 느낌이 들고 잘 안써지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우리 기술이 떨어지는 겁니까." 박 대통령의 말이 "써봤더니 안좋더라"는 얘기로 들려 당황스러웠지만 차분하게 설명을 드렸다.

"그런 느낌의 차이는 볼 굵기 때문입니다. 각하께서 써보신 외국 볼펜의 볼 굵기는 1㎜입니다. 저희는 0.7㎜ 볼을 씁니다. 굳이 0.7㎜ 볼을 쓰는 것은 한글의 특성상 세필(細筆)을 선호하는 국민들의 필기 습관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기술로만 따지면 0.7㎜ 제작이 더 고난도의 기술입니다. 그리고 모나미 볼펜도 조금 쓰고 나면 부드러워집니다." 박 대통령은 내 설명에 꽤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이 박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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