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11월27일 옛 체코슬로바키아 정치가 알렉산더 둡체크가 태어났다. 1992년 교통사고로 몰(歿). 둡체크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대독(對獨)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제2차 세계대전기를 보낸 그는 전후 지방 공산당 간부직을 거쳐 1968년 1월 강경파 스탈린주의자 노보트니의 후임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둡체크는 당권을 쥐자마자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모토 아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사법부와 의회의 독립성 강화 등 민주화 노선을 추진해나갔다.그러나 '프라하의 봄'은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사회주의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냐는 논란을 빚었다. 둡체크는 소련의 개입을 막기 위해 자신과 개혁파 동료들이 모스크바에 우호적인 공산주의자들이고 개혁 조치들은 내정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그 해 8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는 자국 탱크를 프라하에 진주시키고 둡체크를 비롯한 개혁파 정치인들을 체포해 '프라하의 봄'을 끝장냈다. 체코슬로바키아 민중은 소련군에 대항해 연일 시위를 벌이는 한편 수많은 마을 이름을 '둡체코보'(둡체크의 마을)로 바꿈으로써 모스크바로 끌려간 지도자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으나, 일주일 뒤 프라하로 돌아온 둡체크는 눈물 속의 연설을 통해 자유화 조처의 철회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둡체크는 이듬해 당에서 축출돼 20년간 삼림 관리인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얼마 전 명예를 회복했다. 1989년의 이른바 '벨벳 혁명'으로 조국이 자유화된 뒤, 둡체크는 만장일치로 연방의회 의장으로 뽑혔다. 슬로바키아 출신이었던 그는 조국이 체코와 슬로바키아 둘로 나뉘기 직전에 타계함으로써 죽은 뒤에도 체코슬로바키아 지도자로 남게 됐다.
고 종 석/편집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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