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차업체에 금형을 납품하는 H사의 총무부장 K씨는 상장기업의 실적 발표가 몰려있는 연말이면 어김없이 속앓이를 한다. 중소기업들이 납품단가를 매년 깎아줘 완성차업체의 생산원가 절감과 매출 신장에 적지않은 공을 세웠지만 대기업들의 공치레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대기업들은 중소기업을 협력기업이라며 겉으로는 제 식구 챙기듯 하지만 중소기업의 실상은 지주에 딸린 소작농과 같습니다. 중소기업의 고혈을 짜내 생산원가를 낮춘 자기 회사 직원들에게는 수천만원씩 상여금을 안기면서 중소기업에게는 '다음해 납품단가 추가 인하'라는 족쇄를 채우기 일쑤입니다."
H사는 매출의 50% 이상을 대기업의 하청물량으로 채우기 때문에 '원청업체의 횡포'를 울며 겨자먹기로 감내할 수밖에 없다. K부장은 "대기업 직원들의 넉넉한 생활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한번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며 탄식했다.
대기업의 횡포로 직원들의 사기가 추락한 H사의 사정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철강 제조과정에 필수적인 생석회를 생산하는 B석회는 지난해 300%정도의 부채비율이 1년만에 480%까지 치솟아 도산위기를 맞고 있다.
1998년 톤당 7만4,000원이던 생석회 납품단가가 6차례나 떨어져 올해는 5만7,000원까지 추락했다. 그동안 인건비와 공공요금 상승으로 인해 생산비는 30∼40% 오른 것과 대조적으로 납품 단가는 급격히 떨어져 경영난을 겪고 있는 것.
이 회사의 사장은 "외환위기 이후 수익 위주의 내실경영을 추구하는 대기업들이 비용절감 요인을 중소기업에게만 떠넘기고 있다"며 "중소기업은 거래단절을 우려해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대기업의 불공정한 하도급 관행이 80∼90년대에 비해 상당폭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대기업과 3년간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거래한 중소기업은 망하기 마련"이라는 통설이 있을 정도로 대기업의 하도급 횡포는 중소기업들에게 인력난, 자금난, 판로난 등 전통적인 경영애로 요인에 버금가는 고통을 주고 있다.
기협중앙회가 최근 대기업 1차 협력업체 215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하도급 거래 실태조사 결과, 36.1%가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 형태로 대기업의 일방적인 단가 인하를 지적했다.
특히 70%의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거래단절 조치를 우려해 시정 요구조차 못했으며 정부 등 관계기관에 신고하겠다는 응답도 8%에 불과했다.
기협중앙회 관계자는 "가격 횡포 외에도 하도급 대금 지급을 60일 이상 지체하거나 어음할인료(지연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대기업들도 많아 중소기업들이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며 "하도급 불공정 행위를 감시할 수 있는 정부 차원의 조사기구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태훈기자 onewa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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