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에서 공약들을 쏟아내고 있다. 공약들은 식탁의 풍성한 반찬처럼 유권자의 젓가락질을 기다리고 있다. 교육재정 확대, 아파트 값 인하, 육아비 지원 등 좋은 공약이 너무 많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어려울 정도다.공약의 홍수 속에서 이것을 잘 판단하는 방법은 없을까?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공약들을 모두 실현하려면 과연 돈이 얼마나 필요할까 하는 점이다. 공약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돈은 후보자 개인이나 소속 정당이 내는 것이 아니라 결국 국민들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결국 공약이란 내 주머니 돈으로 남이 생색내겠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공약 중에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보지 말고, 생각을 바꿔 내게 필요 없는 것이 얼마나 들어 있는가를 보는 것이 현명하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가장 나쁜 공약은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일, 정부가 해서는 잘 못하는 일을 굳이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무리한 공약 추진의 부작용을 겪어 왔다. 주택 200만 호 건설은 물가상승을 일으켰다. 또 선진국 반열에 들기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서둘러 가입한 결과 외환위기를 초래했다. 이번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약을 지키기 위해 의약분업을 몰아 붙인 결과, 의사들의 약 판매에 따른 수입이 없어졌고 이를 보전해 주기 위해 진료비가 인상되었다. 그런데 진료비 증가 부분 모두를 환자가 직접 부담하는 것이 아니고, 의료보험을 통해 보전하기 때문에 환자들은 실제로 전체 진료비가 얼마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이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과잉진료를 받거나, 필요 이상으로 병원을 찾게 되었고, 그 사이에 보험재정은 수조원대의 적자를 보게 되었다.
이렇듯 시장경제에서는 정부가 필요 없이 나서서 문제를 오히려 망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시장경제에서 정부가 꼭 해야 하는 일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잘 지키는 것이며, 그 밖의 필요한 물건은 시장에서 제대로 공급되게 하는 것이 좋다.
어느 경제 추리소설을 보면, "가장 질서정연한 경제는 가장 덜 계획된 경제"라는 구절이 나온다. 시장경제에서는 소비자에게 필요한 물건에 대해서는 이윤이 발생하므로 공급업자는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 물건이 사라질까 봐 밤잠을 설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국민들이 개인적으로 쓰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굳이 정부가 공급하겠다고 나설 필요는 없다.
시장경제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갖고 있다면, 공약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럴듯한 공약을 많이 나열할수록 거짓말을 많이 하는 것이거나 부작용을 많이 일으키겠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공약 중에서는 겉으로만 좋아 보이면서 결국 국민 부담을 늘이는 것들이 많다. 공약에는 일부 유권자를 위해 낚시 미끼처럼 들어 있는 것도 있고, 이익단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끼워 넣은 것들도 섞여 있다. 이런 공약들은 차라리 지켜지지 않는 것이 나을 정도이다. 공약을 실현하는 것은 공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거 과정에서 공약을 요구하고 선거 후 공약 지키기를 감시하는 것이 선거의 본래 목적이 아니다. 선거에서 공약을 제시하는 본래의 목적은 후보자가 전반적으로 가진 정책적 입지를 알게 하고, 소속 정당의 정책개발 능력을 보려는 것이다.
공약의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지켜야 한다면, 자칫 이익단체들에게 발목을 잡히는 것이 될 뿐이다. 이렇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선거를 통해 쓸 데 없는 공약을 하는 후보를 걸러내고, 잘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낫다. 잘못한 일을 심판하지 않고 새로운 약속에 현혹된다면, 돈은 자신이 내면서 남에게 속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홍 기 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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