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가요계에는 '언더그라운드'라는 낯선 용어가 떠돌기 시작했다. 주류 가요를 거부하고 방송 출연을 기피하는 가수들을 부르는 말이었다.들국화도 그 중 하나였다. 미8군 무대를 포함해 밤무대를 전전하던 전인권(48·보컬)이 80년부터 알고 지내던 허성욱(97년 사망·건반)과 세션맨으로 활동하며 신촌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던 최성원(48·베이스)과 의기투합해 82년 결성했다. "음악 성향은 제각각이었지만 '진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함께 나누고 있었다"는 게 전인권의 설명이다.
록이 퇴조하면서 라이브 콘서트 열기도 식은 지 오래였지만 음반을 내기도 전에 공연부터 나섰다. 83년 11월 피카디리 극장 옆 에스엠카페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가졌다. '그것만이 내 세상' '매일 그대와' 같은 노래는 이 때부터 불렀다.
기타리스트 조덕환(48)이 가세해 85년 9월에 발매한 들국화 1집의 표지는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 '렛 잇 비'를 떠올리게 했다. 전인권은 "우리가 하려는 음악이 비틀스처럼 편한 록이었고 케네디 사후의 비틀스처럼 우리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죠"라고 설명한다. 그의 말대로 들국화와 그들의 음악은 80년대 젊은이들에게 비틀스처럼 사랑받았고 기능했다.
들국화의 음악은 록이되 팝과 클래식 요소가 많아 누구나 쉽게 빠져드는 음악이었다. 연주는 군더더기 없이 세련되었고 "일체의 기교없이 자연스럽게 부르고자 했던" 전인권의 보컬은 울음이 섞인 듯한 독특한 음색에 솔직한 창법으로 한 소절만 불러도 듣는 이의 마음으로 파고 들었다. 노래 가사는 과격하면서도 희망적이었다. 노래 '행진'은 '하리라' '하리오'가 일반적이던 노랫말에 '행진하는 거야'와 같은 새로운 종결어미를 선보였다.
'그것만이 내 세상'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세계로 가는 기차' 또한 세상의 중심인 나에 대한 확신과 낙관을 제시했다. 70년대 이래 노랫말에 대한 자기검열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들국화는 굳이 정치적 함의를 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무언가를 담아냈다. 젊은이들이 빠져 있던 팝송에 비해 음악적으로 전혀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외국 음악에서는 느낄 수 없던 정서와 메시지로 충만한 들국화의 1집은 수록곡이 모두 히트했다. 들국화 1집은 지금도 한국의 명반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방송 출연을 하지 않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실력과 의식있는 밴드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방송으로 할 일은 라이브 콘서트로 대신했다. 82년부터 87년 전인권 허성욱이 대마초로 구속될 때까지 모두 200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 86년 조덕환이 빠지고 주찬권(드럼) 손진태 최구희(이상 기타)를 보강했고 두 장짜리 실황 음반을 발매하며 라이브 콘서트 붐을 주도했다.
들국화는 가요가 팝송보다는 한참 떨어진다고 여기던 젊은이들의 귀를 가요로 돌려 놓았다. 록 밴드라면 라이브를 해야 하고, 노래에 메시지를 담을 수 있으며 노래보다는 음반이 중요하다는 원칙을 새삼 일깨워 준 것도 들국화였다. 들국화는 신중현에 이어 한국 록의 제2기를 열었다.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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