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25일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할복 자살했다. 45세였다. 미시마는 자신이 주재하는 '다테(楯:방패)의 회' 회원 4명을 이끌고 육상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에 난입해 총감을 가두고 막료들에게 부상을 입힌 뒤 자위대의 궐기를 외치며 제 배를 갈랐다. 흔히 '미시마 사건'으로 불리는 그의 공개 자살은 일본 열도만이 아니라 전세계 문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미시마 유키오의 본명은 히라오카 기미타케(平岡公威)다. 도쿄(東京)에서 태어나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전후 세대의 허무주의와 이상 심리를 탐미적 스타일에 담아 '사랑의 갈증'(1950) '금색(禁色)'(1951∼1953) '긴카쿠지(金閣寺)'(1956)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일본 문단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다. '우국(憂國)'(1960)을 쓸 무렵부터 급진적 민족주의자로 변한 미시마는 그 뒤 작품들에서 천황제 파시즘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흘린 끝에 결국 일본의 재무장을 외치며 자결하는 방식으로 '우국지사'가 되었다. 그의 자살은 극단적 탐미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친연(親緣)을 다시 확인시켰다.
천황주의자 미시마는 아라히토가미(現人神)였던 히로히토(裕仁)가 인간으로 추락한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대일본제국 헌법'과 '일본국 헌법'의 분열 위에 어정쩡한 자세로 있던 천황에게 미시마는 정색을 하고 다시 신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쇼와(昭和) 연호의 시작과 함께 생을 시작한 미시마는 20년간 신격(神格) 천황 아래서 자랐고, 나머지 25년을 인격 천황을 보며 살았다. 그는 이 연호를 사용한 천황이 자기보다 20년 가까이나 더 '인간'으로 살 것을 짐작이나 했을까?
고 종 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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