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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 전남 장흥군 대덕읍 돌탑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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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 전남 장흥군 대덕읍 돌탑 공원

입력
2002.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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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그 유명헌거요? 독(돌)허고 바구(바위) 배끼 없지라."남도에서도 오지로 통한다는 전남 장흥군. 거기서도 대덕읍은, 마주서면 산(천관산·723m)이고 돌아 앉으면 너른 다도해인, 육지 끝 자락의 작은 마을이다. 그래서 1,900가구 5,300명의 읍민 절반은 미맥(쌀·보리)농사로, 절반은 매생이나 해태를 뜯어 먹고 산다고 했다. 그 주민들이 2년 전부터 비원(悲願)을 쌓듯 탑산사 아래 길 따라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제는 명물이 된 대덕읍 돌탑공원은 그렇게 들어섰고, 문학공원도 세워졌다. "널린 게 돌 밖에 없으니 헐 짓이 이 것밖에 없지라. 첨엔 별 짓도 다 허네 싶었는디, 차츰 하다 봉께 재미도 있습디다.(신흥마을 김선배씨)"

20일 오전 8시30분. 대덕읍 천관산 남쪽 탑산사 자락에 20여명이 모여 들었다. 보리갈이를 끝낸 농사꾼도 있고, 해태 발 작업 도중 짬을 낸 어부도 섞였다. "시작혀 볼꺼나." 아낙네들이 20㎏들이 비료 포대에 아이 머리통만한 돌들을 져 나르면서 돌탑 쌓기가 시작됐다. 반반한 돌을 골라 탑의 외벽을 만든 뒤, 잡석으로 속을 채우는 단순작업. 3시간 나우 지나자 제법 원추꼴 탑신(塔身)이 어른 허리께까지 올라갔다. 3m가량 높이로 쌓는데 대략 사흘이 걸린다고 했다. "이 탑은 그냥 '무명탑(無名塔)'이여, 이건 돌이 덜 예뻐서 어떨 지 모르것네.(산외동마을 이용진씨)"

주민들의 돌탑 쌓기는 2000년 11월, 마을 토박이인 당시 읍장 한봉준(韓鳳準·50·장흥군 문화공보과장)씨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그는 "남도 마을들이 크든 작든 유적이 있고 문화유산이 있지만 장흥, 특히 대덕읍은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었다"고 말했다. 대덕읍 출신 문인들은 많지만 그나마도 옆 마을 강진의 '영랑생가'나 '다산초당'이 유명세를 타면서 기를 못 폈다고 했다. 주민들의 자조처럼 돌과 바위밖에 없는 고장, 그래서 돌탑을 쌓아보자는 안이 나왔다. 억새 바위산인 천관산 산세도 돌탑을 쌓은 듯하고, 탑산사가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 읍 단위 사업에 끌어 쓸 예산이 없고, 그래서 다른 지방자치단체처럼 번듯한 다른 사업은 엄두도 못낼 상황이었다는 점도 현실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공무원 건강의 날(매주 수요일) 읍사무소 직원들끼리 일을 시작하면서 이장회의를 통해 우리 뜻을 전했죠." 반응은 시큰둥했다. 초당마을 주민 위광량씨는 "첨엔 아그들 장난도 아니고 그게 뭔 짓인가 했지라. 헌디 마실삼아 가봤더니 그게 아닙디다." 지난 해 초 덕촌리 주민들이 단합대회를 겸해 쌓아 놓은 돌탑을 보고 인근 마을들도 하나 둘 동참하기 시작했고, 틈틈이 읍내 29개 리(里) 주민들이 모두 돌을 주워 날랐다. 탑 쌓는 날은 머릿고기에 막걸리를 곁들인 마을 잔칫날이 되기 일쑤였고, 남도 특유의 '육자배기' 가락도 빠지지 않았다. 읍민들은 신명이 나자 손톱에 피멍이 들고 돌 모서리에 무릎을 찧어도 자진해서 나섰다. 누가, 어디에다 쌓겠다고 허가를 얻을 일도 아니어서 '메이커 없는' 것도 부지기수로 쌓였고, 그렇게 만들어진 돌탑이 현재 470여 개에 이르게 됐다. 마을 탑 뿐 아니라 대덕중학교 동창생들이 고향 동창모임을 기념해 쌓은 '정탑(情塔)'도 섰고, 지난 월드컵 때는 대덕읍 축구회에서 4강 기념 돌탑도 세웠다. 의용소방대원, 부녀회, 로터리클럽 등 지역 단체도 나섰다. 사찰 아래 돌탑쌓기가 못마땅할 법도 하지만 교회단체까지 성금을 내고 팔을 걷어 부쳤다.

지난 해 5월부터는 돌탑공원 바로 위 4,000평 땅을 다듬어 문학공원 조성사업을 시작했다. 대덕읍 손승현(孫承炫)총무계장은 "여기가 없이 살아도 예부터 문학적 전통이 강했다"고 했다. 탐진강을 따라 늘어 선 10여 개의 정자가 바로 가사문학과 시문학이 번성했다는 증거이고, 그래서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이승우씨 등 장흥출신 문학인들이 많다고 했다. 읍 유지 50여명이 1인당 30만∼50만원씩 부담했다. 일손은 일부 공공근로를 제외하면 대부분 주민 자원봉사. 일부 사업가는 "고생하싱께 나는 장비(포크레인)나 댈랍니다"며 거들었다.

출신 작가는 물론이고, 남도 땅과 문학적 인연이 깊은 문인들의 육필 원고와 헌사(獻詞)를 받았다. 시인 구상 문병란 김재현 채희문 씨 등 26명과 소설가 최일남 전상국 양귀자 박범신씨 등 19명, 평론·희곡작가 안병욱 차범석 김병익씨 등 54명의 문학비가 섰고, 상징 돌탑인 높이 15m, 폭 9m의 7층 '문탑(文塔)'도 섰다. 단풍나무 8,000주를 헌수받아 문학공원 주변을 단장했다. 봄에 꽃을 피우는 철쭉과 춘란, 늦 가을 붉은색 꽃대를 올리는 '꽃무릇(석산화)'도 심었다. 지난 2월 문학공원 개막식 축사에서 저항시인 문병란씨는 "선약 때문에 못 온다고 해놓고 개막식 이틀 전에 미리 둘러봤다"며 "하지만 와서 보니 놀랍고 읍민들의 정성이 너무 고마워 약속을 물리치고 달려왔다"고 말문을 열기도 했다.

일년 열 두 달 가봐야 관광객 구경이 힘들었던 이 마을에는 요즘 문학 답사팀의 발길이 잦아졌다. 광주에서 가까운 산 너머 마을인 관촌읍에 관광버스를 대고 천관산을 찾던 등반객들도 상당수 산을 돌아 대덕읍 루트를 찾는다. 30대 남짓 차를 댈 수 있는 탑산사 주차장은 그래서 주말이면 차 댈 곳이 없다고 했다. 탑산사 진영(眞影)스님은 "등산로에 붙어 선 암자 스님은 등산객이 늘어나 수도(修道)에 어려움이 많다"면서도 싫지 않다는 표정이다. 관촌읍 주민들은 "천관산을 대덕읍에 빼앗겼다"며 농반진반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읍사무소 관계자는 "다른 읍은 물론이고, 멀리 완도 마을 일부 단체도 '돌탑을 쌓겠다'며 연락이 오고, '날 잡아서 탑 쌓으러 갈 테니 돌을 모아달라'는 읍 출신 출향민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장흥= 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원유헌기자 youhoney@hk.co.kr

● 문학공원 조성 뒷얘기

소설가 K씨는 지난 해 5월 '저는 이 나라 남녘고을 장흥군 대덕읍의 읍장을 맡고 있는 한봉준입니다' 로 시작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처음에는 솔직히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해 8월 배달된 또 한 통의 편지. '먼저 번 서신에 이런 분들이 귀한 글을 주셨습니다….' 그제서야 찬찬히 읽어봤더니 '소설 쓰는 이청준 형'의 고향 마을에서 문학공원을 조성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곳 출신으로 현재 활동중인 문인만도 줄잡아 20여명. 그 분들을 위한 사업이겠거니 하고 또 무시했다고 했다.

그랬는데 달포쯤 뒤에 한 읍장의 전화가 두어 번 더 걸려왔고, 반신반의하며 남도를 배경으로 한 자신의 소설 한 대목을 펜으로 써서 보냈다고 했다. 잊고 살다가 최근 우연히 그 곳에 들르게 된 그는 자신의 속물근성과 무심함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돈 없고 빽 없는' 시골 읍장과 주민들이 '돈 안 되는 문학'에 이렇게 신경을 써 준 게 고마웠습니다."

당시 읍장이었던 한봉준(사진·장흥군 문화공보과장)씨는 문인협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서 211명의 명단을 뽑아 문학공원 사업의 취지와 함께 글을 청탁하는 편지를 썼고, 이 가운데 54명이 격려와 함께 흔쾌히 글을 보냈다. 한 작가는 뒤늦게 공원을 둘러본 뒤 자기 문학비가 없자 몹시 서운해 했다고 했다.

한 과장은 "그 분께도 세 차례나 편지를 띄웠었는데 워낙 바빠서 못 보셨나 봅디다. 사과하고 나중에 다시 글을 부탁드리기로 했습니다."

"저처럼 이름없는 사람이 귀한 분들 글을 받아 모으는 게 어디 쉬웠겠습니까. 그래서 더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그는 하지만 이 일이 결코 내세울 일도 아니라고 했다. "저야 읍장을 맡다 보니 곁에서 북 장단이나 넣어준 거지, 뭐 한 게 있습니까."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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