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경제공동체를 구성하려는 논의와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있다. 아시아 경제의 맹주를 꿈꾸는 중국이 최근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키로 합의한 가운데 일본도 아시아 각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서두르고 있는가 하면, 한·중·일 3국간 경제공동체 구성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동아시아가 궁극적으로 유럽연합(EU) 같은 경제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이러한 아시아 경제공동체 논의에서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구상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빨라지는 통합논의
중국은 지난해부터 아세안과의 시장통합 논의에 적극적이다. 이달초 프놈펜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담에서 양측은 자유무역지대(FTA) 창설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에 합의했다. 중·아세안 FTA가 예정대로 2010년까지 완성될 수 있을 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는 중국의 필요와 정치적 결단에 달려 있다는 게 정부 및 민간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한국무역협회 정재화 FTA팀장은 "아세안 10개 국가들의 경제적 격차가 크기 때문에 시장 통합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아세안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자국의 이익을 양보한다면 빠르게 진전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일본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중국의 남진(南進)으로 자국의 생산기지이자 시장으로서 역할을 해온 동남아에서 영향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중국이 아세안과 FTA 협상 일정을 발표한 다음날 일본이 아세안과의 FTA 추진에 합의한 것은 이 같은 경계심의 표출로 보인다. 중국과 일본의 패권 경쟁이 동아시아의 시장통합을 가속화할 것이란 전망이 가능하다.
아세안 국가들은 중국보다는 오히려 산업구조가 상호 보완적이고 시장이 큰 일본이나 한국을 FTA 상대국으로 선호할 수 있다. 때문에 아세안이 중국과 일본의 경쟁관계를 이용한 협상전략을 펼 여지가 충분하다.
아시아 경제의 3대축인 한·중·일 3국간 경제통합 논의도 활발하다. 22일 서울에서 3국 재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처음 열린 한·중·일 비즈니스 포럼은 3국간 FTA 체결을 촉구하는 서울선언을 채택했다. 지난해 11월 아세안+한·중·일 정상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제안으로 추진된 이 포럼은 궁극적으로 동북아 3국의 경제공동체 창설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업종별 포럼에서는 한·중·일 철강 FTA 결성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그 동안 유명무실했던 '방콕협정'도 중국이 가입하면서 활기를 띠고 있다. 방콕협정은 개도국간 무역자유화와 경제협력을 위해 1976년 체결된 아시아 지역의 유일한 다자 무역협정이다. 회원국은 한국 방글라데시 인도 라오스 스리랑카 중국 등 6개국이다. 올해 초 중국의 가입을 계기로 회원국간 관세인하를 위한 협상(제3라운드)이 진행 중이다.
▶상호불신과 견제
한·중·일 3국의 시장이 통합되면 인구 14억5,000만명, 국내총생산 5조8,000억달러, 교역규모 1조6,000억달러의 거대시장이 탄생한다. 아세안까지 합치면 인구는 19억7,000만명으로 세계인구의 32%, 국내총생산은 6조3,700억달러로 전세계의 20%, 교역규모는 2조4,000억달러로 18%를 차지하게 된다.
유럽연합(EU)의 팽창,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와 중남미를 포괄하는 범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창설 등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동아시아의 시장통합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 국가들의 경제적 격차와 역사적 배경 등을 감안할 때 경제통합은 쉽지 않는 명제이다.
이달초 아세안 정상회담에서 주룽지(朱鎔基) 중국 총리가 한·중·일 FTA 체결을 제안했을 때도 일본 언론들은 의구심을 먼저 드러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중·한 FTA 구상은 비현실적"이라며 정부 관계자들의 부정적 견해를 전했다. 지난달 도쿄에서 열린 한·일 FTA 공동연구회 2차 모임에서 한국측이 "한·일 FTA가 궁극적으로 중국 등 제3국에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자, 일본측은 "우선 한·일 FTA에만 초점을 맞춰 논의하자"며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동북아에서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경쟁심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도형 계명대 교수(무역협회 객원연구원)는 "일본은 중국,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역사적 빚을 청산하지 못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경제 통합을 이루려면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그럴 가능성이 낮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상철기자 sckim@hk.co.kr
■ 정부 FTA 추진상황
우리나라는 현재 일본 및 싱가포르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 중이며, 중국·아세안 등과는 중장기 과제로 미뤄 놓고 있다.
일본과는 1998년 한·일 통상장관 회담에서 민간차원의 공동연구에 합의한 후 지난해 양국 경제인들의 'FTA 비즈니스 포럼' 이 두 차례 열렸다. 정부 차원에서 적극 나선 것은 올 3월 고이즈미 총리의 방한 때 양국 정상이 '산·관·학 공동연구회' 발족에 합의하면서부터다. 산·관·학 공동연구회는 7월과 10월 두 차례 열렸으며 앞으로 2∼3개월마다 열릴 예정이다. 공동연구회의 최종 보고서는 2년 이내에 제출하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정부 차원의 공식 협상은 2004년 이후에나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양국은 두 차례 공동연구회에서 농업 등 특정분야를 배제하지 않고 전 산업을 포괄하는 FTA를 추진하기로 의견 접근을 보았다. 또 관세철폐, 비관세장벽의 획기적 개선, 서비스시장 개방 등 실질적인 FTA를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일 FTA는 일본경제의 하청기지화를 우려하는 국내 반대 목소리와 정서적 반감이 적지 않고, 일본이 농산물 시장개방 등에 여전히 소극적이어서 순조롭지 않을 전망이다.
이 때문에 일본보다 오히려 싱가포르와의 FTA가 빨리 성사될 가능성이 있다. 한·싱가포르 양국은 14일 통상장관 회담에서 내년초 산·관·학 공동연구회를 발족, 6개월간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정부간 교섭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싱가포르는 우리나라의 FTA 추진의 '아킬레스건'인 농업의 비중이 낮기 때문에 타결이 어렵지 않을 전망이다. 정부는 한·싱가포르 FTA가 아세안과 FTA 체결을 위한 전초전 성격을 갖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FTA 추진은 '먹기 좋은 곶감 빼먹기 식'의 근시안적 대응에 머물고 있을 뿐 중장기적 전략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정인교 동서남아팀장은 "중국과 일본이 아세안과 FTA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상황을 감안할 때 싱가포르와의 FTA 추진은 아세안에 대한 전략 차원에서 검토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이 중국과 일본의 경쟁심리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경원 상무는 "한국이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서 '칩 딜러'로서 리더십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라며 "정부의 보다 치밀하고 전략적인 대응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김상철기자
■FTA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전 세계 무역자유화를 추구하는 세계무역기구(WTO)체제와 대비되는 개별국가간 관세철폐와 무역자유화를 추구하는 협정이다. 협정 체결국간에는 무역이 자유롭지만, 비회원국을 차별한다는 점에서 WTO의 이념과 충돌할 수 있으나, WTO 협정에 의해 허용되고 있다. FTA의 확산이 세계적인 무역자유화를 촉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무역지대(Free Trade Area)
두 나라 뿐 아니라 특정 지역내 여러 나라가 동시에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형성되는 자유무역협정지대. 미국과 멕시코간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 아세안 10개국이 체결한 아세안자유무역지대(AFTA)가 대표적이다. 한·중·일 3국의 동북아자유무역지대도 이런 맥락에서 논의되고 있다.
경제공동체
유럽연합(EU)처럼 상품과 서비스의 교역은 물론이고, 화폐까지 통합된 체제이다. 동아시아에서도 단일통화 논의가 제기되긴 하나, 구체화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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