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11월23일 시인 이용악이 함북 경성에서 태어났다. 1971년 몰(歿). 이용악은 1930년대에 등단한 뒤 해방 이전까지 당대의 유이민(流移民) 문제를 시적으로 천착해 뒷날의 문학연구자들로부터 '유이민 시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그 유이민 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것이 '전라도 가시내'다. "알록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로 시작하는 이 시는 막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의 어느 허름한 술집을 찾은 한 함경도 사내가, 석 달 전 두만강을 먼저 건너와 작부로 일하고 있는 전라도 여자에게 건네는 연대의 언어다. 만주 유이민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이 시에서 전라도 가시내와 함경도 사내를 굳게 묶는 것은 가난과 실향, 더 근원적으로는 빼앗긴 조국이다.
이용악은 해방기 서울에서의 좌익활동으로 1950년 2월 체포돼 복역하던 중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석방돼 북으로 올라갔다. 1953년 8월 남로당계 숙청 사건의 여파로 한 동안 집필 금지 처분을 받았다가, 복권돼 연작시 '평남관개시초'(1956) 등을 썼다. 월북 이전의 이용악 시세계는 남쪽 시인들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이용악은 흔히 임화로부터 비롯된 이야기 시를 완숙 단계로 끌어올렸다는 말을 듣는다. '전라도 가시내'의 경우도 그렇지만, 예컨대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르다"('북쪽' 전문) 같은 6행의 짧은 시에서도 그 이야기성은 또렷하다. 그 이야기성은 신경림·김지하·최두석 같은 남쪽 시인들의 작품에서 메아리와 그림자를 얻고 있다.
고 종 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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