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남준(45)씨가 전북 완주 모악산 아래 버려진 집에 자리잡은 지 12년 째다. 그는 이제 그 자리를 접으려고 한다. "해가 잘 들지 않아 습한 모악산방을 떠나 새로운 삶터를 찾고 싶다"고 한다. 박씨가 직접 찍은 사진과 글을 묶은 산문집 '꽃이 진다 꽃이 핀다'(호미 발행)는 박씨가 모악산에서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지도 모르겠다.'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가 눈에 들어오면 사람에게는 그것을 갖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욕심이 고통의 근원이 된다는 걸 알고 아무리 누르려 해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어렵다. 욕심을 뿌리째 뽑으려면 무언가를 눈에 들이지 말아야 한다. 굳게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박남준씨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집 주변을 알짱거리며 돌아다니는 뭇 짐승들의 눈치를 보고, 새끼 낳은 고양이에게 제대로 밥을 챙겨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 하고, 창호지 문틈에서 거미를 보고 밖에 내보낼까 하다가 따뜻한 방이 그리웠겠지, 하면서 눈을 돌리는 사람. 그 여리고 맑은 심성이 시인의 문장에 투명하게 비친다. 탁하고 험한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싶은 민망한 마음이 들다가도, 그가 그런 세상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등을 돌렸다는 것을 떠올린다.
잔 나뭇가지와 소나무 잎을 주워 장작으로 쓰고 잘 말린 곶감에 하얗게 분을 내어 신세 진 사람들과 조금씩 나눈다. 그 산속에서 뭘 먹고 사나 싶은데, 산이 시인을 먹인단다. 쑥국, 고사리국, 취나물, 달래장…. 뿌리고 가꾸지 않아도 들에 산에 먹을 것이 지천이다. 산이 사람에게 베푼 것을 사람이 산에게 갚는다. 시인은 물을 자박자박 잡아 따뜻한 밥을 지어 한 숟가락 떠다가 개울가 버들치에게 먹인다.
그렇게 고운 시인의 가슴에도 가끔씩 먼지가 엉기나 보다. 모악산방을 찾는 손님 맞이로 분주한 봄날을 보냈다. 사람들에 치여서 어느날은 그만 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싫은 마음이 들어오자 좀처럼 쫓아낼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한문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 얘기 하나를 들려주셨다.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사는 과부가 있었다. 집을 찾는 손님 대접에 정성을 다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도대체 얼마나 잘 대하는가 보자면서, 짓궂은 사람들이 하루 내내 줄지어 찾아왔다. 밤늦게 아홉번째 손님이 찾아오자 아들이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어머니 손님이 또 오셨어요, 라고 알렸다. 어머니가 상을 차린 뒤 방에 들어와 신음 소리를 내며 누웠다. 깜짝 놀란 아들이 갑자기 어디가 편찮으시냐고 묻자, 어머니가 답한다. 내가 손님 대접에 정성을 다한 것은 아비 없는 네가 인연을 만들고 선비의 예를 배우라는 뜻이었는데, 너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귀찮게 여기다니 부질없고 헛된 일이 되고 말았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치 큰 깨달음을 얻고 얼굴이 발그레해진 시인은 짐짓 딴청 부리면서 바깥을 내다본다. 먼지가 쓸려 나간 자리에 시심이 내려앉는다. "한 꽃이 지고 한 꽃이 피어난다. 저 눈부신 것들을 어찌 견딜 수 있을까."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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