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냐시오 라모네 지음 상형문자 발행·1만2,000원어린 시절에 TV속에 등장한 슈퍼맨과 원더우먼, 6백만 불의 사나이는 지구평화를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세월이 지나 그들도 은퇴할 나이가 되자 맨 인 블랙 같은 신세대 영웅들이 지구평화의 숭고한 임무를 계승했다. 그런데 하나같이 신기하게 영웅들은 미국에 살며 미국을 먼저 구해준다. 시간이 남으면 가끔 다른 나라로 출동도 하지만 역시 그때도 미국인이 훨씬 우선이다. 그렇다. 사실 지구의 영웅들은 미국만의 영웅이었고 알고 보면 미국의 거대한 음모였던 것이다.
'소리 없는 프로파간다― 우리 정신의 미국화'는 미국이 생산해 온 영화나 드라마, 광고 등 영상 이미지 속에 녹아 있는 '미국 이데올로기'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책이다. 저자는 스페인 출신으로 현재 파리 7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재직중이고,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주간인 이냐시오 라모네이다. 비 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본 이 책은 그 동안 우리가 무심코 눈으로 즐긴 미국의 광고,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를 제3자의 입장에서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저자의 관점에서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을 보자. 유명한 헬리콥터 공격 장면은 탁월한 연출, 현기증 나는 로우 앵글, 바그너의 음악, 하늘의 혼잡함, 이 모든 것이 감각을 통해 미군 특수부대와 동일시하는 관객을 열광시키고 도취시키고 흥분시킨다. 그러나 각각의 장면들은 공격자의 관점에서 촬영되었다. 절대로 공격받은 사람들, 패배한 베트콩의 시점을 제공하지 않는다. 소수의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혼란스럽고 불유쾌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주관적인 카메라 효과의 이데올로기적 사악함보다는 팝콘을 먹으며 안락의자의 편안함 속에 묻힌다. 영상물의 문제는 이처럼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광고는 더욱 심각하다. 광고는 '욕구'가 아닌 '욕망'을 창조해 낸다. 상품이 제공하는 실제적 서비스 보다는 '이미지'가 중요시되고 이는 곧 상품에 대한 숭배를 만들어낸다. 식기세척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을, 비누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자동차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판다. 정치광고에서는 그 후보의 정치적 사상보다는 잘 만들어낸 이미지가 보일 뿐이다. 공익광고는 영상 속 환상의 사회를 보여준다. 드라마의 사이사이에 삽입되는 광고들은 미국 TV의 스타일을 결정했다. 프로야구가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인 이유는 매 회 단절되는 그 사이에 광고를 삽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들은 현재 한국에서도 똑같이 쓰이고 있지만 시작은 미국이었던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외에도 저자는 재난영화가 제공하는 위기에 대한 환상들과 이탈리아 서부영화에 얽힌 정치적 은유, 코작과 콜롬보로 대표되는 미국 경찰 드라마의 내재적 의미를 분석하는 등 다양한 미국 영상물에 접근한다.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맹추격에 흔들리던 80년대에도 군수산업과 영화산업에서는 1위를 놓치지 않았다. 미국 중심의 세계화를 이루기 위해서 무기와 문화라는 양 분야를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 군사력이 보이는 위험이라면 할리우드 영화로 대표되는 미국문화는 보이지 않는 위험으로 전세계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서서히 침투해 들어간다. 그리고 그 피해는 군사력보다 더욱 심각하다.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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