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DR의 90%는 바보, 10%는 엘리노어."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중 한 사람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측근의 농담이지만 퍼스트레이디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일침이기도 하다.
대공황을 극복하며 미국을 경제대국으로 이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세계평화를 이루고자 애썼던 루스벨트에게 엘리노어는 아내인 동시에 정치파트너였다. 여자에게 선거권도 없던 당시에 그녀는 성실성과 겸손을 바탕으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음지에 선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앞장섰다. 소박한 문체로 신문에 '마이 데이(My day)'라는 칼럼을 써 대통령과 국민을 가깝고 친숙한 관계로 만들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취임 당시 31세의 아름답고 지성적이었던 재클린은 백악관을 우아하고 화려한 성으로 가꿔놓고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해 시대의 신화를 이룩했다.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을 통해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대통령의 지위를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직접 정계로 나섰다.
오랜 민주주의 역사에 걸맞게 다양한 타입의 퍼스트레이디를 갖고 있는 미국에 비해 우리에게는 기억에 남는 퍼스트레이디가 거의 없다. 해방 후 홀연히 나타난 벽안의 프란체스카 여사는 재임 당시에도 국민에게 낯설기만 했으며, 최근 들어서야 그녀의 근검절약 미담이 알려지고 있다. 젊은 나이에 대통령 대신 비명에 간 육영수 여사는 국민에게 인자한 미소가 남아있는 유일한 분이다. 갑작스럽게 등장했던 이순자 여사는 분주했던 활동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눈에 긍정적이지 못했다. 김옥숙 여사는 국민에게 관심과 애정이 있는 퍼스트레이디로 비춰지지 못했다. 손명순 여사 역시 대통령의 그림자 역할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였다. 현재 이희호 여사는 그 경력으로 미루어 활동이 기대되었지만 그다지 인상적인 활동은 하지 못했다.
선거가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분위기가 썰렁하다. 국민들의 정치불신 때문일 것이다. 두 번의 민주선거로 성숙된 정치문화를 기대했던 국민은 이제 더 이상 정치인에게 기대를 갖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장래의 퍼스트레이디의 역할과 자질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이제 대통령 후보 부인들은 적극적으로 자기가 할 일을 국민에게 내놓아야 한다. 교육이나 위생, 주거환경, 사회복지와 봉사 등 섬세한 통찰이 요구되는 분야에서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는 스스로의 역할을 밝혀야 한다. 남성 대통령의 감각이 덜 미치는 분야에서 여성으로서 살펴야 할 일은 이 사회에 넘치고 있다. 퍼스트레이디가 되고자 하는 후보 부인들이 이에 대해 연구하여, 구체적 청사진을 펴 보인다면 국민들의 기대와 관심이 더 커질 것이다.
그 동안 대통령 부인은 화려한 옷을 입고 행사장에 나타나 테이프를 끊고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외교사절들과 악수를 하는 모습만 비춰졌다. 그들은 한결같이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밖에서 하시는 일을 나는 모릅니다'는 양 내숭을 부렸다. 섣부르게 나섰다가 자칫 실수해서 좋지않은 결과가 나왔던 기억 때문에 몸을 사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의 신념과 자질이 부족했다는 말일 것이다. 뒤에 숨어서 자기 일은 다 챙기고 자신의 행동은 다 묻어 버리려 했으니 국민들 사이에는 확인되지 않은 부정적인 소문만 연기처럼 감돌 뿐이었다.
이번에 선출되는 대통령 부인은 높은 신분만큼 사회적 의무도 질 줄 아는 양심적인 분이면 좋겠다. 남편을 대통령으로 뽑아 준 국민에게 감사하고 역사를 두려워하는 현명한 분이면 좋겠다. 측근만 챙기지 않고 국민 모두에게 희망과 사랑을 베푸는 어진 분이면 좋겠다. 임기를 마치고 나서 전직 대통령 부인끼리 허물없이 만나 봉사활동을 펴는 헌신적인 분이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검하고 정직한 분이면 좋겠다. 성군 시대에는 충신이 나오고 폭군 밑에서는 간신배만 득세하듯, 진실한 퍼스트레이디가 있는 곳에서 신뢰 받는 정부가 나올 것이다.
박 명 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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