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5월 모나미153 볼펜이 본격 시판되기 시작했다. 좋은 품질, 멋진 이름, 적당한 가격. 3박자를 두루 갖춘 볼펜이 시장에 풀리면 엄청난 소비 붐이 일겠지. 이미 일본에서 내 두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던가. 나는 볼펜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의심할 수 없었다. 이 값싸고 편리한 제품을 사지 않을 소비자는 없으리라, 자신만만했다.그러나 나의 기대와 확신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볼펜은 단 한 자루도 팔리지 않았다. 나와 직원들은 볼펜의 참패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넋을 잃고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즉각 판매 부진의 원인 찾기에 나섰다. "물감, 크레파스를 판매하면서 유통망은 이미 잘 갖춰져 있었다. 충분하진 않지만 시제품을 나눠주며 홍보도 했다. 그런데 왜…."
원인은 하나였다. 국민들이 오랫동안 몸에 배인 필기 습관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글씨를 쓸 때마다 펜촉에 잉크를 묻혀야 하는 것이 번거롭고 불편하긴 했지만 오랫동안 반복하다 보니 더 이상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습관이 돼버린 것이다.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습관은 자기 의지로도 바꾸기 힘든 법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이 습관을 억지로 바꿔주려고 했으니 될 리가 없었다.
특히 당시 어른들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볼펜이 대중화한 뒤에도 볼펜 쓰기를 꺼려했다. 심지어 "볼펜으로 글씨를 쓰면 글씨를 버린다" 며 어린이들의 볼펜 쓰기를 말리기까지 했다. 명필과 악필은 글씨 쓰기 학습과 습관, 자신의 자질 등에 따라 좌우되는 것인데 볼펜을 쓰면 악필이 되고 펜촉을 쓰면 명필이 된다는 어이없는 소문까지 퍼졌다. 이 때문에 볼펜 판매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어쨌든 원인이 발견됐으니 치유책을 마련해야 했다. 무엇보다 소비자들이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펜과 잉크병' 생활에서 불편함을 자각하도록 해야 했다. 그런 뒤에 관심을 볼펜쪽으로 돌리게 하는 전략이 필요했다. 나는 직원들과 숙의를 거듭한 끝에 '책상에서 잉크병 없애기'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나는 매일 아침 직원들 가방에 모나미153 볼펜을 꽉꽉 채워줬다. 그리고 하루 종일 관공서, 은행, 기업 사무실 등을 돌아다니며 펜의 단점, 볼펜의 장점을 어떻게 알릴지 교육시켰다.
"잉크병은 언제 쏟아질 지 모른다. 들고 다니기도 힘들다. 하지만 볼펜은 옷이든 가방이든 어디든 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꺼내 쓰면 된다. 펜이 사용하는 잉크는 수성이다. 물이 닿으면 글씨가 금방 번져 힘들게 써놓은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볼펜 잉크는 유성이다. 물이 묻어도 번지지 않는다. 주요 문서 기록에는 볼펜이 제격이다. 이런 점을 부각시켜라."
본격적인 '책상에서 잉크병 없애기' 운동이 전개됐다. 관공서, 기업, 은행에서 펜을 쓰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볼펜을 주고 써보도록 권유했다. 일하던 사람의 펜을 빼앗다시피 해서 싸움이 나기도 했다. 잠시 쉬는 틈에도 볼펜을 손에 쥐고 계속 '똑딱'거리면서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판촉활동에 익숙해지자 꾀를 내는 직원도 생겼다. 어떤 직원은 은행에서 옆 사람이 펜으로 입출금 청구서를 쓰자 일부러 물을 엎질러 못쓰게 만든 뒤 볼펜을 꺼내 대신 청구서를 써주는 방법으로 볼펜을 홍보해 큰 성과를 올렸다. 직원들의 그런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1, 2년 뒤부터 모나미153 볼펜의 판매 실적 그래프는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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