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이른 초겨울 한파가 몰아친 18일 새벽 6시 서울 강북의 유일한 연탄공장 '삼천리e& e'. 컨베이어 벨트가 불규칙한 소음과 함께 분탄을 슬레이트 지붕 건물 안으로 쏟아넣었고, 쌍탄기(雙炭機)는 정확히 3.6㎏의 무게를 지닌 22공탄을 줄지어 토해냈다. 1968년 동대문구 이문동에 공장이 들어선 이래 매년 겨울 새벽 그려지던 풍경은 이날도 그대로였다.인근 17개 공장중 홀로 남아
이문동의 터줏대감인 연탄공장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공장은 위장막 같은 분진 차단막을 둘러쓴 채 아파트 숲속에 숨어있었다. 아파트 값을 붙잡고 늘어진 자신의 존재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컨베이어 벨트에 분탄이 쉼 없이 실리도록 야트막한 야산 같은 분탄 더미에 한창 꼬챙이질을 하던 손종대(59)씨는 "더럽고 힘들지만 한창때는 임금도 괜찮았고, 연탄공장 근무자는 통행금지도 열외시켜 줬다"며 시커먼 줄이 그인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세 아들을 모두 대학까지 보내도록 30년간 꼬박꼬박 월급을 챙겨준 연탄공장에 그는 매일 아침6시에 출근해 저녁 8시까지 일한다.
한때 연탄공장 17개가 이웃했던 이곳에 홀로 남은 삼천리 공장은 올 겨울 들어 하루 평균 1,000톤의 분탄을 30만장의 연탄으로 바꿔낸다. 때이른 추위 덕에 수요가 늘었다지만 한창 때의 10분의 1이고 27대의 쌍탄기 중 13대가 놀고 있다. 300여명이 득실대던 3,000여평 공장터엔 22명만 남아 공장도가 167원25전의 연탄을 찍어 월급을 받는다.
이날 대학생들이 캠코더와 사진기를 들고 그들에겐 박물관이나 다름없는 연탄공장을 견학 왔다. 그들 중 몇은 "연탄을 처음 봤다"는 믿기지 않는 말을 했다.
가난한 동네 찾아 트럭배달
연탄 도매상 강동기(53)씨는 새벽 5시30분이면 연탄 공장으로 들어선다. 거래하는 지방 공장과 화원에 연탄을 배달하려면 도로가 안 막히는 시간에 바삐 움직여야 한다. 새벽 댓바람에 경기 용인시를 다녀와 오전9시 2.5톤 트럭에 연탄 2,000장을 차곡차곡 쌓으며 '두 탕째'를 준비했다. 삼천리 공장과 거래하는 강씨 같은 도매상은 100여명. 동네 연탄가게 사장이던 이들은 가게문을 닫아건 채 트럭을 몰고 사라지는 소비자를 찾아 다닌다. "올 겨울 주문은 꽤 쏠쏠하다"는 강씨는 하루 '세 탕'이 기본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욕심을 버렸다고 했다. 연탄공장이 그렇듯 도매상도 겨울 한철 장사다.
7톤 무게의 화석연료를 싣고 두 탕째에 나선 연탄차의 목적지는 서울의 '빈곤 벨트'. 연탄차는 기름과 도시가스를 때는 아파트와 빌라촌을 지나 외로운 섬으로 남은 빈곤 벨트에 들어섰다. 강씨는 강북구 수유3동 최기진(79) 할아버지의 연탄 가게 앞에 장 당 200원에 1,000장을 부렸다. 최 할아버지는 장가 못 간 장애인 넷째 아들과 함께 서울에서 유일해 보이는 연탄소매 가게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고, "30년 연탄가게를 해왔지만 7남매 학교도 제대로 못보냈다"고 자조했다.
연탄차는 골목길에 주차된 차들을 어렵게 피해 다시 수유동 한 부동산에 연탄 200장을 내려놓았다. 부동산 주인은 "냄새 난다"는 윗층 세입자들의 원성에도 연탄난로를 고집하고 있다고 했다. 이웃의 눈흘김도 기름값 10분의 1의 '싼 맛'을 어쩌지는 못했다.
서울 아직 1만가구가 사용
연탄차의 최종 목적지는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달동네였다. 그곳에서 만난 장모(75) 할머니는 한 쪽눈이 실명이었다. "6·25때 남편 죽고 어찌 어찌 흘러와 이러고 산다"는 말 뒤로 장 노파는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노파는 IMF로 망하고 홀아비가 돼 '노동일' 한다는 마흔 넘은 조카와 전세 400만원의 곧 허물어질듯한 슬레이트집 단칸방에 산다.
장 노파는 "아직 연탄 때는 것들이 어디 사람이여…"라면서도 연탄 200장이 집 한 켠에 차곡차곡 쌓이자, 주름 많은 얼굴에 포만감을 드러냈다. 하루의 고단함에 찌들어 돌아올 마흔 넘은 조카에게 자글자글 끓는 아랫목은 세상이 주는 유일한 위안이란 걸 노파는 알고 있었다. 연탄을 부리는 동안 잠깐 사라졌던 장 노파는 "고생했어"라며 드링크 한 병을 땀방울 맺힌 강씨의 콧등 앞에 내밀었다.
하월곡동 달동네도 요즘 철거와 재개발의 소음으로 귓전이 따갑다. 강씨는 "저기가 전부 우리 단골 살던 곳"이라며 외벽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아파트를 가리켰다. 아직 달동네에 남은 이들 대부분도 올 겨울만 이곳서 날 요량이라고 한다. 연탄벨트는 계속 졸아들 운명이다.
아직 철거 계획이 서지않은 신림 10동에는 연탄 때는 집이 20여 가구 남아있다. 동네 가게에선 톱밥이 주원료인 '번개탄'이 10개들이 2,000원에 팔려나가고 있었고, 대문 앞 쓰레기 봉투엔 연탄재가 탑을 이룬다. 저녁 무렵이면 연탄 아궁이가 뿜어내는 메케한 내음이 밥짓는 냄새에 섞여 골목길을 떠돈다. "돈 1,000원이면 하루종일 아랫목 절절 끓는 맛을 기름보일러는 죽어도 못 따라와."며느리가 집을 나가 하루 세 번 숨을 참아가며 직접 연탄을 간다는 전대길(65) 할아버지의 연탄 예찬이다.
불과 몇 년 전 연탄의 거창한 소비지였던 관악구 신림 7동 난곡 마을은 재개발 계획이 확정된 지난해 말부터 철거가 시작돼 지금은 잔해만 남았다. 난곡마을의 소중한 연탄 보급처였을 구멍가게는 '삼천리연탄'이란 간판을 단 채 주인 없이 철거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고, 지난 겨울 팔다 남은 눅눅한 연탄 10장이 횅댕그렁한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이 동네서 연탄으로 겨울을 나던 이들은 이주지원금 몇 푼을 받아 들고 지금 기름 때는 동네로 흩어져 세살고 있다.
삼천리e& e 김두용 이사는 "얼마 전 서울시 공무원들이 '연탄공장은 이제 서울에서 사라질 때가 됐다'고 말해 한참을 싸웠다"고 말했다. 몇 남지 않은 연탄 소비자들이야 동두천이나 다른 지역 공장이 해결해 줄 것이라며 민원의 근원인 이문동 공장도 문닫아야 한다고 주장해 '뭘 모르는 소리'라고 항변했다고 했다. 그는 개발시대 '역군'의 대접은 원치 않지만 아직 서울에서 연탄공장이 사라질 때는 아니라고 했다. 서울에 아직도 1만 여 가구가 연탄을 난방연료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 이동훈기자 dhlee@hk.co.kr
■한국戰후 대중화… "길어야 10년"
우리나라에서 연탄이 대중 연료로 정착한 것은 1950년 한국 전쟁 이후부터다. 이후 50년간 국내 업체가 생산해낸 연탄은 돈으로 약 30조원 어치인 5억6,000만 톤. 한푼의 외화가 아쉬웠던 시절 국내 연탄산업은 국민경제 발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해왔고 산림훼손 방지의 부수입도 안겼다.
하지만 86년 2,425만 톤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이래 해마다 연탄 생산량이 급감, 올해의 경우 100만 톤 정도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80년대 중반만해도 서울에 17곳이던 연탄공장은 지금 삼천리에서 분사한 이문동 삼천리e& e와 금천구 고명산업 두 곳만 남았다. 연탄 소비자도 서울의 경우 90년대 초 190만 가구에 이르렀지만 유가하락과 소득향상 등으로 해마다 40∼50%씩 줄어들고 있다.
급격한 수요감소 추세에도 그나마 연탄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어느 에너지원보다 가격이 싸기 때문이다. 88년부터 공장도가 167.25원을 줄곧 유지하기 위해 연탄업체는 장 당 140.75원의 정부지원을 받고 있다. 그래서 달동네 서민들은 물론 화훼단지와 공장, 음식점 등은 여전한 연탄 소비처다.
하지만 정부도 국제가 보다 두 배 이상 비싸 현저하게 경제성이 떨어지는 국내 석탄 산업을 더 이상 키울 의지가 없다. 340개에 달하던 탄광은 현재 7개로 줄어들었다. 현재 연탄 소비량을 산업으로 유지할 수 있는 최저 수준으로 분석하고 있는 업계에서는 "연탄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10년"으로 보고 있다.
/이동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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