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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36)소설가 윤대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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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36)소설가 윤대녕

입력
2002.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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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 작업실을 한강이 지척에 있는 파주로 옮겼다. 이년 새 작업실을 세번째 옮긴 것이다. 주위에서 그런 나를 연장 탓을 하는 목수인 양 보는 시선이 있다. 한편 그렇다는 것을 인정한다. 작업실을 세 번 바꾸는 동안에도 컴퓨터와 책상으로 쓸 밥상을 차에 싣고 남한 곳곳을 싸돌아 다녔다. 작년에 속초에서 우연히 만난 소설가 김훈 선생이 내 민박집에 와 하룻밤 묵었는데 그때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선비가 수레(자동차)를 끄는 것도 모자라 이제 밥상까지 들고 다니는구먼. 그러면서 혀를 쯧쯧 찼다.그렇게 돌아다녔건만 일년 가까이 똑똑한 글 한 줄 써내지 못하고 있다. 나이 마흔에 걸려 넘어지면서 콘택트 렌즈를 처음 꼈을 때처럼 세상이 문득 남사스러워 보여 장기간 어지럼증을 극복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때를 틈타 나는 지금껏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자문에 몇 차례 시달렸다. 내가 뭘 하겠다고 이러고 다니는 걸까?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계란 장수를 하면 어떻고 수레를 끌고 다니며 채소 장사를 하면 어때. 그저 잘 살면 그만이지. 지금까지 나는 자의식보다는 무의식의 혼란 덩어리인 육체에 의존해 소설을 써왔던 것 같다. 사는 일도 그렇게 몸에 맡겨두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자의식이라고 했지만 내 삶에 있어서 첫번째 의식의 대상은 어둠이었다. 다섯 살 무렵 어두컴컴한 방에서 삶에 최초로 눈 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허름한 고옥(古屋)에 노인네 둘과 나뿐이었다. 몰락한 양반가라는 사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깨달았고 내가 태어날 무렵부터 가문은 이미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백부나 부친을 포함해 집집마다 방랑하는 자들이 수두룩했고 타지에서 마주쳐도 서로 반가운 낯을 하지 않았다. 경사(慶事)는 거의 없었고 조사(弔事)가 생겨 어쩌다 모이게 돼도 헤어질 때가 되면 굳이 돌아보거나 말을 건네는 법이 없었다. 그 풍경이 고독에 처한 정신주의자들의 숙명적인 모습으로 어린 눈에 비치기도 했으나 한편 나약하고 매정해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 매정함은 집집마다 부자 관계에서도 그대로 유전됐다. 결코 상처받고 싶지 않았지만 어린 나는 분명 외롭게 상처받고 있었다.

한학을 했던 조부만이 허물어져 가는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늙음을 책으로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슬하에 반벙어리의 어둠 덩어리인 내가 있었다. 조부는 밤마다 등잔불 밑에서 내게 한자와 붓글씨와 그림 따위를 가르치며 문사(文士)로서의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그는 내게 아비였고 나는 일찌감치 늙음을 벗하며 살아야 했다. 때로 방랑하던 자들이 소리없이 돌아와 사랑채에 숨죽여 머물다 어느날 새벽에 다시 떠나가곤 했다. 그래서 나도 나이가 들면 그래야만 되는 줄로 알았다. 그것을 의식 이전에 몸으로 먼저 받아들였다. 책이 흔했으므로 눈여겨보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고 맨발로 다니는 자들과는 어울리지 않도록 배웠다. 또 비루한 무리들과는 함께 하지 말고 가급적 혼자 존재해야 한다고 조부는 내게 가르쳤다.

그렇게 시대착오적이고 반사회적인 인물이 되어 나는 뒤늦게 부모에게로 보내졌고 조부가 그토록 밤마다 혼을 담아 내게 심어놓았던 남루한 혈통의 자부심은 곧 상실되고 말았다. 우선 부모가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역마살이 낀 부친을 따라 일 년에 한 번 꼴로 학교를 옮겨 다녔으나 결코 재운이 따르지 않았던 부친의 팔자 탓에 가난은 두고두고 극복되지 않았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으나 하루하루 굴욕을 견디며 버릇처럼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살았다. 그리고 발작적으로 가끔 가출을 단행했다. 그것만이 내가 살아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삶이 쫀득쫀득하고 재미 있을 리 없었다. 기쁨이나 행복은 의식 언저리에 남지만 고통은 몸에 남는 법이다. 세상은 단단해서 남다른 재주가 없으면서 자존심만 세고 남하고는 어울리지 못하는 내가 끼어 들어갈 틈이 없었다. 만성적인 권태와 우울에 빠져 낙오자 신세를 겨우겨우 면하며 스무 살까지 간신히 버텼다. 먹고 사는 일이 늘 고단했던 부친과는 스무 살이 되어 집을 떠날 때까지 몇 마디 말밖에는 나눠보지 못했다. 그는 아비로서 외아들인 내게 신발끈 매는 법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게 되면 비정하게 나무라거나 외면했다. 그래서 나는 뜻하지 않게 소심하고 불안한 자로 변해갔다. 그러나 그에게서도 나는 한가지 배운 게 있다.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동해야 한다는 것과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부친은 평생을 거의 노동자와 다름없이 살았음에도 남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을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출한 경력이 있었으므로 대학에 들어가서는 시도 때도 없이 온 남한을 싸돌아 다녔고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는 유년기의 어둠을 그대로 끌어안고 아예 절로 들어가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익히 보아왔던 방랑자들이 어디서 무얼 보고 무슨 짓을 하며 다녔는지 못내 궁금했던 탓이 컸으리라. 그 중에는 우주와 시간과 죽음과 해탈을 말하던 자도 있었다. 피의 구역질을 느끼며 계절마다 절간을 옮겨 다니며 나도 어느덧 비바람과 눈보라에 익숙해졌다.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면 속에서 두엄 썩는 냄새가 입으로 올라왔다. 고독할 때는 불경과 심지어는 무사도에 관한 책을 읽으며 버텼다.

결과적으로, 더 이상 갈 데가 없고 받아주는 데가 없어 소설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서 소설을 쓰는 일은 세상에 턱걸이를 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스물여덟 살에 어렵사리 등단하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세상에 속해 있는 나를 발견했다. 당선 통보를 받은 그날 문을 닫고 처음 내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세상에 들어오기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나는 쥐를 잡아먹고 연명하는 자처럼 몸부림쳐야 했다. 그러나 등단 후에도 속은 늘 화염처럼 들끓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모진 상처를 주면서까지 계속 떠돌아다녔다. 그 자격지심은 여지없이 자학으로 이어졌고 어느날 문학이 내 삶을 구속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부친처럼 노동이 하고 싶어졌다. 오직 몸으로 먹고 살고 싶었다. 그것이 신성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양계장과 배 타는 일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나 같이 책만 읽은 허우대에 술과 담배에 곯은 자는 어떤 노동에도 쓰여질 수 없음을 알고 다시 한번 크게 절망했다.

문학으로 뜨거운 국과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어느날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그래, 그것뿐이었다. 지금껏 아비에게도 단 한번 굽히지 않았던 내가 기어이 문학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남자 나이 마흔이 됐으니 이 일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돼버렸다. 굶어죽지 않고 버티는 게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미덕이라는 것도 알았다. 자진해서 세상 밖으로 나갈 생각이 아니면 어쨌든 턱걸이를 계속해야 한다. 세상과 매끈하게 어울리는 재주는 없으나 땀을 흘리고 뛰어와야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는 건 안다. 그러나 입장권을 얻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다. 그것이 내가 문학을 하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뼈아픈 후회와 고통을 기꺼이 끌어안고 살아갈 도리밖에 없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우주에는 내가 그리워하는 자들이 아직도 떠돌고 있지 않은가. 마주치면 막상 외면하더라도 그들과 만나기 위해 더욱더 떠돌지어다. 괴로우면 밤마다 더욱더 많은 쥐를 잡아먹을지어다. 그때 중처럼 매정했던 자들이 내게 밤마다 사념의 빛을 던져온다. 그때 내가 고통을 줬던 자들이 지금 내게 고통의 양식을 짊어지고 저기 오고 있다. 삶은 끔찍하고도 거룩한 것. 그러나 그 앞에서 굽히지 말고 온몸으로 다시 버틸 것.

● 연보

1962년 충남 예산 출생 1988년 단국대 불문과 졸업 1990년 단편소설 '어머니의 숲'으로 '문학사상' 신인상 수상 등단 소설집 '은어낚시통신' '남쪽계단을 보라'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 장편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추억의 아주 먼 곳' '달의 지평선' '코카콜라 애인' '사슴벌레 여자' '미란' 산문집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 등 오늘의젊은예술가상(1994) 이상문학상(1996) 현대문학상(1998)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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