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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52)베를린 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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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52)베를린 칙령

입력
2002.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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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년 11월21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1세가 베를린에서 제1차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나폴레옹은 그보다 한 달 전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해 유럽 대륙의 패권을 확고히 한 뒤, 베를린에 막 입성한 참이었다. 베를린 칙령의 목표는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은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제압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였다. 영국 식민지들을 동요시키기 위한 1803년의 이집트 상륙 작전이 실패한 데 이어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도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넬슨의 영국 함대에 패하자, 나폴레옹은 '육지로써 바다를 정복'하기로 하고 이듬해 베를린에서 대륙봉쇄령을 내렸다.베를린 칙령은 러시아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유럽 모든 나라와 영국 사이의 통상·통신을 금지하고, 점령 지대의 영국인을 포로로 삼는 동시에 그들의 상품을 몰수하며, 영국과 그 식민지에서 온 상선이 유럽의 항구에 기항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나폴레옹은 더 나아가 그 이듬해 12월 밀라노에서 내린 칙령(제2차 대륙봉쇄령)을 통해 영국에 기항했던 상선들을 국적과 상관 없이 모두 나포하도록 했다.

영국은 대륙봉쇄령 초기에 작지 않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내 경제난은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거나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은 나라들을 영국 또한 역으로 봉쇄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식민지 무역에 기댈 수 있었던 영국에 비해 대륙 국가들의 어려움은 더 컸다. 결국 유럽 각국과 영국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밀무역이 성행하게 됐다. 특히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을 노골적으로 무시할 정도로 나아갔다. 격분한 나폴레옹은 1812년 5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진격했으나, 동장군(冬將軍)으로 병력 대부분을 잃고 패퇴해 몰락을 재촉했다.

고 종 석/편집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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