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을 시리게 하는 매서운 겨울바람에 실려 러시아의 거장 보리스 에이프만이 그의 발레단을 이끌고 온다. 작년 5월 '붉은 지젤' 공연으로 러시아 현대발레의 진수를 보여주며 국내 무용팬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기도 했다. 이번 공연은 좀 더 러시아 색채를 강화했다. 12월3∼8일 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공연에서는 최근작 '러시안 햄릿'을 새로 추가했다.'러시안 햄릿'은 18세기 중엽 러시아를 강국으로 키운 예카테리나 2세와 그의 불행한 아들 파벨에 관한 이야기다. 위대한 통치자 예카테리나 2세의 즉위과정은 피비린내 나는 암투의 연속이었다. 그는 남편인 표토르 3세를 암살해 왕관을 빼앗았지만 고독과 아들 파벨의 정신적 파멸도 함께 얻었다. '러시안 햄릿'은 아버지의 살해를 목격한 파벨의 별명이다.
에이프만은 러시아 황실의 음울한 분위기와 암투와 간계로 무너져가는 파벨의 영혼을 베토벤과 말러의 음악에 맞춰 안무했다. 2막으로 나눠진 작품에서 1막은 베토벤의 교향곡과 소나타를 이용해 고뇌하는 모습을, 2막은 말러의 교향곡을 사용해서 여린 영혼의 방황과 파멸을 그려나간다. 절묘한 선곡이다. 에이프만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 나는 상당히 많은 양의 음악을 듣는다. 음악은 내 작품의 극작법"이라고 말했듯이, 무용과 문학과 음악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을 추구한다. 당연히 자신의 모든 작품을 안무 뿐만 아니라 각본도 직접 쓴다. 그래서 관객들에게는 단순한 무용이 아닌 그 이상의 감흥을 준다.
6, 7일에 공연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8일에 공연하는 '돈키호테―어느 정신이상자의 환상'에서도 문학적인 깊이를 무용으로 표현해낸다. 특히 후자는 돈키호테를 정신병동의 병자로 설정해 정신병자의 몽상을 통해 세르반테스 작품의 재해석을 추구한다.
무용수들의 뛰어난 기량과 무대를 역동적으로 꽉 채우는 연출도 종합예술의 완성도를 높인다. 에이프만은 "안무가로서 나의 임무는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러시아 발레의 새로운 레퍼토리를 창조하는 일"이라고 말해 문학의 고전과 클래식 발레의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무용을 창조하는 자신의 작업이 계속될 것임을 밝혔다. 다음 공연에서는 '돈 주앙과 몰리에르'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02)2005―0114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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