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메아리]대북 지렛대 안 놓쳐야

입력
2002.11.19 00:00
0 0

터무니없는 얘기라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삼성그룹이 서소문지역 인근을 고층빌딩으로 재개발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 땅에서 다시는 6 .25전쟁과 같은 참화는 없겠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오늘날의 재벌이 어떤 조직이며, 삼성이 또 어떤 기업인가. 만약에 수 년 혹은 수 십년 내에 전쟁과 같은 파멸의 위기가 예상되는데도 삼성 같은 큰 재벌기업이 비싼 돈 들여가며 고층 건물들을 지을 리가 만무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서소문지역에 고층빌딩이 올라가던 시기와 구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에서 냉전체제가 붕괴되는 시점이 비슷했다. 삼성그룹이 이런 여러 내외정세까지 감안하고서 재개발 사업에 착수했는지 확인은 안 해보았지만, 지금도 재벌 기업들의 무한한 정보력이나 상상력, 그리고 세상을 보는 안목에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감탄'의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71년 7월 키신저가 파키스탄에서 '복통'을 구실로 수행 기자들을 따돌린 채 베이징을 찾았을 때다.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으로, 요즘 잘 나가는 라이스 보좌관과 같은 존재였다. 철벽보안 속에 베이징 행 파키스탄 기에 올라 한숨 돌리려던 그는 뜻밖에도 런던 데일리 텔리그라프 통신원에게 발각되었다.

통신원으로부터 기사를 송고받은 데스크는 '이 친구 미쳤군'하고 묵살했을 정도로 키신저의 중국방문은 상상도 할 수 없던 때다. 그러나 키신저의 잠행을 잡아낸 것은 엉뚱하게도 미 곡물메이저의 상업위성 이었다. 거대한 중국시장이 열리기를 고대하던 곡물 메이저들이 키신저의 베이징 행을 놓칠 리 만무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기업들의 정보력이나 사태 판단력은 이렇게 상상을 초월한다.

한반도에 한파가 밀려오고 있다. 계절적 동장군과는 그 모양새가 다르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 '의지'를 밝힌 후부터다. 이라크에 발목 잡힌 미국이 언제 북한쪽에 화살을 돌릴지 알 수 없다. 우선순위에서 뒤질 뿐 북한 핵 문제는 미국의 최우선 관심사다. 순진했던 나의 믿음이 어쩌면 잘못일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되는 조짐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KEDO가 경수로 지원을 재검토키로 했다. 북한의 자세변화가 없는 한 대북 중유공급도 12월부터 중단된다. 순조로워 보이던 경의선 동해선 연결공사가 난관에 부딪쳤다. 북일 수교협상도 제자리 걸음이다. 미국의 본격적인 대북압박 때문이다. 제네바합의의 무효화나 중단이란 표현만 쓰지 않았을 뿐, 사실상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다. 위기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핵 포기의 전제로 미국과의 명시적인 체제보장책(불가침조약)을 '동시 맞교환'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미국의 대북 전략적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미국의 대 이라크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후세인정부의 축출(regime change)이다. 반면 김정일체제에 대해서는 점진적인 변화(regime transformation)의 추구라고 한다.

이 가정이 맞다면 미·북간에 타협점을 찾지 못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믿지 않는다. 부시의 잇단 다짐에도 결국 '이라크 다음은 우리' 라는 피해 의식 때문이다. 부시가 밝힌 '다른 미래'가 북한의 이런 불안을 씻어 주는 설득논리가 돼야 한다. 체면과 위신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는 득보다 실이 크다. 이것은 경험칙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의 대북 지렛대 확보는 긴요하다. 다행히도 3각 채널 가운데 비록 '실낱같지만' 남북창구는 열려 있다. 미국의 강경일변도에 따라 대화통로를 스스로 닫는 것처럼 어리석음은 없다. 지난 94년 남북간 대화가 단절된 후 어떤 덤터기를 썼는가를 생각해 보면 자명하다. 더 이상 일방적인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또 우리의 문제가 우리 의지와 무관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대북대화채널 유지는 불가피하다.

노 진 환 주필 jhr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