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11월19일, 뒷날 청교도 혁명의 와중에 '인민의 적'이라는 오명을 쓰고 제 신민들에게 목이 잘리게 될 영국 왕 찰스1세가 태어났다. 그가 짧은 공화정 시대의 문을 영국인들에게 열어보이며 죽은 것은 1649년 1월30일이었다.총신(寵臣) 버킹엄 공작의 실정이 국민의 불만을 사기도 했지만, 찰스1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전쟁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영국 국교를 강요하다가 반란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의 크고 작은 전쟁들에까지 미주알고주알 간여하며 국고를 탕진했다. 탕진한 국고를 메우느라 찰스1세는 많은 세금을 걷지 않을 수 없었고, 의회는 이를 비판하며 권리 청원(1628)을 통해서 의회의 동의 없이는 과세할 수 없다는 원칙을 확인했다. 다급한 왕은 권리 청원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이듬해 의회를 해산해 국민 대표들의 입을 막았다. 장로파가 다수인 스코틀랜드에 국교를 강요하지만 않았더라도 찰스1세는 그럭저럭 고종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의회 동의 없이 스코틀랜드와 전쟁에 들어간 그는 결국 군비가 모자라 강화할 수밖에 없었고, 복수전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뒷날 '단기의회'라고 불리게 될 이 의회는 국왕에 대한 성토장이 되었다. 찰스1세는 그 꼴이 보기 싫어 3주만에 의회를 해산했지만, 그 직후 스코틀랜드와 또 전쟁이 터지자 다시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찰스1세가 죽은 뒤에도 4년간 더 존속할 이 의회가 이른바 '장기의회'다. 찰스1세는 이 의회에서 자신의 반대파들을 솎아내고 싶었다. 그는 어리석게도 1642년 1월 군사를 이끌고 스스로 하원으로 가 반대파 지도자들을 체포하려다 실패했고, 이 사건은 청교도혁명이라고 불리게 될 내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고 종 석/편집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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