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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록](7)김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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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록](7)김수철

입력
2002.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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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부터 시작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인기는 80년대 중반까지도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84년 이변이 일어났다. 83년 '못다핀 꽃 한송이'로 데뷔한 김수철(45)이 그 해 '나도야 간다'와 '젊은 그대'를 연달아 빅 히트시켰기 때문이다. 작은 체구에 무거워 보이는 전자 기타를 메고 혼이 빠져라 연주하는 김수철에게는 '제2의 신중현'이라는 명예로운 별칭이 붙었다.확실히 김수철은 신중현 이래 맥이 끊겼던 록 기타리스트의 이미지를 다시, 새롭게 심어 놓았다. 신중현과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 등 내로라 하는 프로 기타리스트들이 그냥 서서 연주했던 데 반해 그는 외국 밴드들처럼 양 발을 들고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무대 위를 내달았다. 또한 그의 연주력은 대학 출신 아마추어 밴드가 붐을 이루면서 대학생 특유의 정서와 노랫말에 뒷전으로 밀려난 기타 연주에 대한 생각을 바꿔 놓기에도 충분했다. "테크닉이 있어야 무대 매너도 나온다. 당시는 외국 밴드의 영상물도 보기 힘든 시절이어서 특별히 누굴 따라한 것도 아니었고 흥이 나면 저절로 그런 동작이 나왔다"는 게 김수철의 회고다.

김수철의 기타는 70년대 후반부터 대학가와 방송가에서 소문나 있었다. 1978년 광운공대 재학 중 다른 학교 친구들과 조직한 작은 거인이 대학축제경연대회에서 '일곱 색깔 무지개'로그룹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대중에게도 알려졌다. '일곱 색깔 무지개'는 명백한 하드 록으로 기타 연주만 놓고 보면 당시 출전곡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곡이었다. 딥 퍼플의 '하이웨이 스타'를 듣고 자란 또래 캠퍼스 밴드들은 물론 음악팬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대학축제경연대회 전에도 가요제에 두번 출전했으나 음악이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로 예선 탈락했던 김수철은 "중학교 때 손가락에피 맺혀가며 전자 기타를 익히고 고등학교 때는 방학 때면 '하이웨이 스타'로 무교동 등의 클럽 오디션을 통과해 가발을 쓰고 프로 연주자로 활동했던 나로서는 100% 록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고 말한다. 그가 83년 낸 '못다 핀 꽃 한송이'는 실상 부모의 반대로 음악을 포기하면서 기념삼아 만든 음반이었다. 이 음반이 빅 히트하면서 그는 솔로로 나섰다. 클럽에서 캠퍼스 밴드, 솔로로 이어지는 그의 이력은 한국 록의 역사에서도 매우 특이한 경우다.

'젊은 그대'와 '나도야 간다'가 인기 절정이던 무렵 김수철은 빡빡한 방송 스케줄을 마치면 자정을 넘겨가며 아쟁을 배우러 다녔다. 국악 공부는 이미 80년부터 시작했다. "록에 뿌리를 두고 다양한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과 70년대 대학가의 탈춤 등 전통 문화 운동에 영향을 받은 셈이죠." 록 기타리스트였던 그는 결국 기타 산조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냈다. 어차피 방송 위주의 활동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한동안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 86년 아시안 게임 전야제 음악을 시작으로 전통 음악과 록의 접목을 시작했다. 국악과 록의 여러 요소가 섞인 김수철의 또 다른 록은 한국 록의 지평을 넓혔을 뿐더러 2002 유엔총회 공연 등 한국의 록을 외국에 알리는 역할도 했다. 올 가을 발매한 음반 '팝스 & 록'과 '기타산조'는 80년대 이래 그가 추구해온 두 줄기 음악의 현재형이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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