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키쿠 과장이 볼펜 제조업체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연락을 보내온 것은 그가 귀국한 후 한달 가량 지난 1962년 7, 8월께였다. 물론 그동안 나는 소키쿠 과장과 편지 연락을 하며 일본에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듣고 있었다. 소키쿠 과장이 쓰던 볼펜이 '오토 볼펜 주식회사' 제품이라는 사실도 그때야 알게 됐다. 소키쿠 과장은 편지를 통해 "우치다요코 사장님이 한국내 제품 판매에 힘써준 손 상무님을 위해 볼펜 회사에 소개서를써주시겠다고 한다"는 낭보를 알려왔다. 난 편지를 받자마자 즉시 짐을 꾸렸다.도쿄행 비행기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머리속이 복잡했다. 과연 일본인들이 볼펜 제조기술을 전수해줄 것인가. 아무리 자문해보아도 답은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기왕 나선 길이었다.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차근차근 일본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를 하나씩 점검해 보았다. 볼펜 제조기술 도입도 중요했지만 오토 볼펜에 대한 소비자 반응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도쿄(東京)의 국제 관문이 나리타(成田) 공항이지만 당시는 하네다(羽田) 공항이었다. 공항에 도착해 시내 호텔 방에 들어설 때까지 나의 시선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볼펜에만 쏠렸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공항 출입국관리소나 세관 공무원은 물론 은행 창구 직원, 호텔 직원, 일반 시민 가릴 것 없이 모두 오토 볼펜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 짐작만으로도 오토 볼펜은 일본 필기구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난 우리나라에서도 볼펜이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도착 다음날 나는 우치다요코 사장의 소개서 한 장만 달랑 들고 오토볼펜을 찾아갔다. 응접실에서 나카다 히데오(中田秀雄) 사장과 인사를 나눴지만 그는 내가 찾아온 목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자랑만 늘어놓았다.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학)을 나와 아사히(朝日)신문에 입사, 인도네시아 특파원을 지내기까지의 이력을 장황하게 얘기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기업가의 정신보다 정치가적 기질을 엿볼 수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오토볼펜 창업자의 외동딸과 결혼해 회사를 물려받은 인물로, 경영에 큰 뜻이 없었다. 사장과 인사를 마친 뒤 나는 오토볼펜의 2인자인 마쓰모토(松本) 전무와 마주 앉았다. 깐깐한 인상의 그는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실무형 인물이었다. 죄인을 취조하듯 송곳 같은 질문이 날아왔다.
"공장이 있습니까. 볼펜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 말입니다." "예. 물감과 크레파스를 생산하는 공장을 갖고 있습니다." "유성(油性) 잉크를 제조할 수 있습니까." "아직 만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볼펜의 맨 끝에 들어가는 볼을 만들 수 있나요."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그럼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래서 찾아온 것아닙니까. 기술 협력만 해주면 우린 충분히 해낼 수 있습니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여기서 밀릴 수는 없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패기와 열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난감했다. 기계도, 기술도, 경험도 없이 무작정 찾아와 볼펜 제조기술을 달라니 어이가 없을 수 밖에‥. 그러나 마쓰모토 전무 역시 장사꾼이었다. 일본 시장을 석권하고 해외로 진출해야 하는데 한국 시장은 수입제한에 걸려 완제품을 수출할 수 없다는 점을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회사를 통해 한국 시장에 진출해도 밑질게 전혀 없다는 점을 그는 간파하고 있는 듯했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뜸을 들이던 마쓰모토 전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기술을 가르쳐 드리죠. 단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 유성 잉크 제조기술만 가르쳐 드리죠. 볼펜 팁과 볼 등 재료는 우리 회사 것만 수입해 쓰십시오." 됐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볼펜 팁과 볼을 수입하는 조건이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설령 제조기술을 가르쳐 준다 한들 우리가 그런 정밀 부품을 제조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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