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원주, 제천을 지나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충북 단양에 들어서면 그림 같은 풍광이 길손을 맞는다. 남한강 상류, 소백산맥 자락에 휘감긴 산 첩첩 물 첩첩한 이 고장의 옛 이름이 신선이 사는 땅 '단구'(丹丘)였음이 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초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에메랄드 빛 강물은 푸른 산 그림자를 드리운 채 구비구비 흘러가고, 더러 아기자기하고 더러 우뚝한 산봉우리는 이마에 흰 구름을 인 채 한가롭다.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과 화가들이 시와 그림으로 찬탄해 마지않던 단양 팔경의 아름다운 고장, 하도 험한 오지여서 울고 왔다가 떠날 때는 인정에 반해 울고 떠난다고 했던 고장이 바로 단양이다.
옛 단양은 물 속에 잠겼다. 군청이 있는 지금의 단양 읍내는 새로 건설한 신단양이다. 시골 같지 않게 도로가 바둑판 같고 건물이 반듯한 것은 그 때문이다. 지난해 연말 중앙고속도로 개통으로 단양은 서울에서 2시간 반 거리가 됐다. 쉽게 닿는 곳이 됐으니 울며 올 일은 없게 된 셈이다. 그러나 지금 단양 표정은 어둡다.
"한 마디로 속은 거지. 충주댐 건설로 구단양이 수몰돼 1985년 신단양으로 이주할 때만 해도 충주호 유람선을 신단양까지 띄워 단양을 국제적인 호반 관광도시로 만든다는 정부 약속을 믿고 꿈에 부풀었는데, 그 뒤 17년 동안 정부가 해준 것이 있어야지. 지난해와 지지난해에는 신단양 선착장에 배가 한 번도 안 떴어요. 유람선이 관광객을 내려놔야 그 덕에 먹고 살 텐데, 살 길이 없어요. 다들 떠나고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만 남았지. 정말 큰 일이예요."
단양읍의 신단양 나루 선착장 앞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주민 차기숙(61)씨는 "앞은 강이고 뒤는 산이라 뻗어나갈 데가 없으니, 여기가 바로 귀양지"라며 단양의 우울한 오늘을 전했다.
단양 인구는 계속 줄고 있다. 1960년대 10만 명에 육박하던 인구가 지금은 3만 7,000여 명에 불과하다. 65세 이상 노령 인구가 전국 평균의 2배인 14%나 되는 것도 젊은 층이 계속 빠져나간 탓이다. 지역 경기는 10년 가까이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1987∼94년 여객선이 신단양까지 매일 10여 차례 다닐 때는 활기에 넘쳤었다. 주민들은 저마다 가게를 내고 여관을 차려 관광객을 맞았다. 그러나 서울 등 수도권의 홍수 조절과 발전 등의 목적으로 충주댐의 물을 빼는 바람에 충주호 수위가 낮아져 배가 못 뜨는 날이 늘면서 상황은 뒤집어졌다. 현재 충주호 유람선이 신단양까지 오는 것은 하루 한 번, 그것도 올해 10월부터다. 올해는 집중호우로 배가 뜰 만큼 충분히 물이 찼는데도, 유람선 업체는 적자를 이유로 신단양 구간을 운항하지 않았다.
배가 잘 안 다니다 보니 굳이 타려는 사람도 없어 신단양 나루는 썰렁하기만 하다. 14일 신단양 나루에 내린 유람선 손님은 겨우 8명, 전날은 4명 뿐이었다. 선착장 앞 여관촌의 25개 여관은 밤에도 불 켜진 방이 별로 없다. 자연히 거리도 한산하다. 단양의 중심가인 군청 앞 도로 변에는 노래방, 단란주점, PC방 등 가게가 즐비하건만, 낮에도 인적이 드물다. 관광철이 아니라서 더하겠지만,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저녁 6시만 넘어도 미용실 등 많은 가게가 셔터를 내린다.
단양상설시장에서 식당을 하는 권국란(62)씨는 "추워지면군청 앞 중앙로가 꼭 평양 거리 같다"고 했다. 그는 "식당을 차린 올해 1월보다 더 장사가 안 된다"며 한숨을 쉬었다. 시내 식당들은 석 달 만에 주인 바뀌는 데가 허다하고, 8, 9년 전 1억원 하던 살림집이 5,000만 원에도 안 팔리고, 싯가 20억원이 넘는 여관이 적자를 못견뎌 경매 7억원에 넘어가는 등 주민들이 전하는 단양의 최근 분위기는 스산하기만 하다.
주민들은 한결같이 관광 만이 살 길이라고 말한다. 군청 앞 거리와 단성면 입구에는 '충주호 유람선 신단양까지 운항시켜 단양 경기 살려내자'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주민들은 11일 군청에 모여 이 문제로 토론회도 가졌다.
충주댐을 지어서 단양이 좋아질 줄 알았더니 서울 등 수도권만 득을 보고 단양은 이래저래 피해만 봤다는 생각에 주민들은 배신감을 감추지 않는다. "이 조그만 군에서 아무리 아우성 쳐봤자 들어주길 하나. 털복숭이 부엉이 눈썹 하나 빠진 꼴로 표도 안 나지. 데모도 하고 탄원도 해봤지만, 이젠 지쳤어요." 여관 주인 차씨의 말이다.
중앙고속도로 덕에 서울 등 수도권에서 단양 오는 길이 빨라짐에 따라 경기가 살아날 것이란 전망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명암이 엇갈린다. 길이 좋아지고 보니 전에는 묵어갔을 관광객이 그날로 가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경북 영주시로 빠지는 5번 국도 변 식당들은 바로 옆으로 중앙고속도로가 난 뒤 망했다고들 한다. 주민들은 단성면 상진리에 들어서는 대명콘도에 기대를 걸고 있다. 2개 동 820실 중 12월 1일 1개동 600실이 문을 연다. 콘도 손님들이 들어오면 아무래도 좀 나아지지 않겠냐는 것이다.
단양군은 단양의 미래를 관광에 걸고 관광 기반 조성 사업에 올해 70억원을 투입했다. 관광특구 지정을 추진하는 한편 이곳 특산물인 마늘, 수박, 감자, 사과 등의 농산물 축제, 단양 팔경 축제, 소백산 철쭉제 등 이벤트를 연중 꾸준히 벌여 관광객 유치에 힘을 쏟고 있다. 볼거리를 늘릴 생각으로 신단양 선착장 건너 편 양방산 절벽에 만든 높이 30∼80m의 5개 인공폭포는 10월 6일 개장했다. 그러나 예산이 적다 보니 힘에 부치는 모양이 역력하다.
지난해 단양을 찾은 관광객은 540만 명. 해마다 늘고 있고 올해는 6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단양 인구가 3만 7,000 명 밖에 안되는 것에 비추면 엄청난 숫자다. 관광 성수기인 여름철엔 계곡마다 물 반 사람 반을 이루고 차량 행렬에 길이 막히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머물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는 점이다. 관광객을 붙잡아둘 방안으로 단양은 천혜의 자연을 활용한 계곡 래프팅, 패러글라이딩, 등산 등 야외 스포츠 시설을 정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건표 단양군수는 "단양처럼 아름다운 고장도 없다. 관광 단양의 미래는 잠재력이 무궁하다"면서 "단양은 작지만 살기 좋은 곳, 희망과 꿈이 있는 곳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재 같아서는 아름다움이 오히려 설움이 될 지경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이 자라처럼 모래 속에 살지 못하고 지렁이처럼 흙을 먹지 못하는데 한갓 산수에 취해서 삶을 영위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 말은 단양이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을 요약하는 듯하다. 단양은 희망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관광 단양의 꿈이 이뤄질 때 단양은 비로소 웃게 될 것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사진 류효진 기자
■단양 현황 2002년 10월31일 현재
위치 동 경북 풍기읍, 서 충북 제천시, 남 경북 예천군·문경시, 북 강원도 영월군
인구 13,358 세대 3만 7,667명
면적 780.1㎢(임야 643.1㎢, 논 62.1㎢, 밭 15.8㎢, 기타 59.1㎢)
행정구역 2읍 6개면
예산 1,048억 3,600만원
관광명소 단양팔경 고수동굴 노동동굴 소백산 구인사 도락산 금수산 황정산 남천계곡 등
문화재 단양적성비 온달산성 적성산성 수양개 선사유적지 향산석탑 등
특산물 마늘 고추 사과 수박 약초 산나물 등
산업분포 농가 4,403 가구 1만 3,837명 제조업 78개 업체(한일시멘트 등 3개 시멘트 회사 포함) 2,633명 서비스업 2,497개 업체 8,061명
● 옛 단양 이야기
도로 교통이 발달하기 전 단양은 내륙 오지였다. 주민들은 산간 화전을 일구거나 강변 논밭을 부쳐 살았다. 불편한 육로 대신 강원도 오대산에서 발원해 정선, 영월을 거쳐 내려오는 남한강 물길이 생필품 운반과 교역에 큰 몫을 했다.
단양을 통과한 남한강은 북서로 방향을 틀어 올라가면서 충주, 여주를 거쳐 양평에 이르고 거기서 북한강과 합쳐 한강을 이루며 서울로 흘러든다. 이 물길을 따라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짐배와 뗏목이 다녔다. 짐배는 한강에서 소금을 싣고 올라와 단양을 지나 영월까지 치닫고, 뗏목은 영월에서 출발해 서울까지 갔다. 단양에서 서울까지는 보통 일주일, 물이 적을 때는 보름이 걸렸다.
단양은 중간 기착지여서 뗏사공과 짐배가 쉬어가는 나루가 발달했다. 하진, 상진, 도담삼봉 등의 나루에는 주막이 늘어서 흥청거렸고 술 파는 여자들이 수십 명씩 있어 물길 따라 오르내리는 손님들과 정분도 나곤 했다. 단양의 '띠뱃노래'에는 그때 풍경이 담겨있다.
"올라왔소 소금배가… 어서나와 반기시오… 동남풍에 돛을 달고 영월영춘 올라가네/ 도담삼봉 꽃님네들 술걸러서 가져오게… 못믿을건 한양손님 닻줄하나 클러노니 부지거처 떠나가네/ 인제가면 언제오나 기약없이 떠나가네… 잘있거라 주모들아 변치말고 잘있으면/ 명년삼월 돌아와서 다시한번 만나보세/ 어이가나 한양뱃길 비틀비틀 소금배야/서러워서 못가겠네"
단양의 산 증인인 단양군 노인회장 장충호(84) 옹은 그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뗏목은 많을 때는 한꺼번에 10채씩 내려왔어요. 칡과 새끼로 엮은 뗏목 한 채마다 앞뒤로 사공이 한 명씩 서서 노를 젓는데, 물살 센 여울을 통과할 때면 뗏꾼들이 어깨에 줄을 메어 당기면서 힘내라고 마구 욕을 해대곤 했지. 소금배는 아주 컸어요. 바닥은 활처럼 휘었고, 길이는 한 30m, 폭은 4∼5m쯤 되는데 굵은 돛대에는 뻘겋고 누렇고 시퍼런 돛을 달아 아주 볼만 했어요. 뗏목 장사가 잘돼서 '목상(木商) 돈은 개도 먹는다'고 할 만큼 돈이 흔했지. 그때만 해도 경기가 좋았는데, 물길이 쇠퇴하면서 단양은 그저 구경거리로 남게 된 거지."
그는 "단양처럼 물 좋고 공기 좋고 아름다운 곳도 없는데, 먹고 살 길이 없으니 걱정"이라고 했다. 또 "단양 사람들은 한없이 순박한데, 바보천치처럼 착해서 비위에 안 맞는 일이 있어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용기가 부족한 게 아쉽다"고 했다. 그는 "먹고 사는 데 급급하다 보니 그리 됐겠지만 젊은 사람들이 기백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어찌하면 단양이 살아나겠냐"고 반문했다.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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